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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령의 문화

보령의 문화 글의 상세내용
제목 청소면
구분 지명유래
내용 靑 所 面 (청소면)

전삼한(前三韓) 마한(馬韓)때에는 사랑(沙浪) 또는 사락(沙洛)이라 부르는 부족국가(部族國家)의 영역(領域)이었고, 백제(百濟)때는 신촌현(新村縣) 或은 사촌현(沙村縣)에 속했으며 신라(新羅)때는 신읍현(新邑縣)으로 고처져서 결성군(結城郡)의 영현(領縣)이 되었다가 고려(高麗)때에 보령현(保寧縣)의 領地(영지)로 있었으며 조선(朝鮮)에 들어와서도 보령현(保寧縣)의 영지(領地)가 되었으며, 홍주목사(洪州牧師)의 관할지역으로 보령현감(保寧縣監)과 충청수영(忠淸水營)을 왕래하는 관문(關門)역할을 하는 곳이었다.

충청도(忠淸道)의 척추인 차령산맥(車嶺山脈)이 줄기차게 뻗어내려 내포(內浦) 땅을 이룩하고 한가닥 그 여맥(餘脈)이 서(西)으로 내려오다가 780m의 오서산(烏棲山)이 西海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그 서(西)편 一帶(일부)가 靑水面(청수면)이고, 또 그 서편(西便)이 장척면(長尺面)이었던 것이 조선말엽(朝鮮末葉)에 행정구역개혁(行政區域改革)에 따라 장척면(長尺面)의 송암리(松岩里)의 19개(個)리(里)와 오천면 천동면 일부(鰲川面 川東面 一部), 청수면전역(靑水面全域)을 합하여 청소면(靑所面)이라하고, 진죽(眞竹), 신송(新松), 재정(才井), 죽림(竹林), 성연(聖淵), 정전(井田), 야현(野縣), 장곡(長谷), 팔개리(八個里)를 관할하여 보령군(保寧郡)에 속했다. `95.1월 1일 법률 제4774호로 대천시와 보령군 통합, 보령시 청소면이 되었다.

眞竹里(진죽리)

원래 보령군 장척면(保寧郡 長尺面)의 지역인데 행정구역개혁(行政區域改革)때 내상리(內上里), 송암리(松岩里), 외상리(外上里), 진목리(眞木里), 마참리(馬站里), 죽하리(竹下里), 건정리(乾井里) 一部(일부)를 병합하여 진목정(眞木亭)과 죽하리(竹下里)의 이름을 따서 진죽리(眞竹里)라 하여 청소면(靑所面)에 편입(編入)되었으며 `95.1월 1일 법률 제4774호로 대천시와 보령군 통합, 보령시 청소면 진죽리로 되었다.
여기에는 砂金鑛(소금광)이 많아서 有名(유명)하였다.

전 마 들 (戰馬坪)

백제(百濟) 개로왕(蓋鹵王) 서기(西記) 455年부터 오서산(烏棲山) 서쪽골짜기를 따라 풀잎같이 가느다란 오천만(鰲川灣)에 이르기까지 개울같은 진죽천(眞竹川)을 끼고 질펀한 들판에 국영군용마(國營軍用馬)가 있었다고 한다. 백제(百濟)의 역대왕(歷代王)은 종일 이곳에 순행(巡行)하여 목장(牧場)을 돌보았으며, 또 歷史에 기록(記錄)할 만한 에피소드를 남기기도 하였다. 이로인하여 이 들판은 전마(戰馬)들이라고 명칭(名稱)이 붙게 되었으며, 최근(最近)까지 이 들판의 군데 군데에 말 무덤이 있었으나 경지정리(耕地整理) 관계로 모두 없어졌음은 안타까운 일이다. 따라서 파리재, 맛차미, 대숩말, 장수마루 등의 동리도 이에 기인(起因)됨이 많다 하겠다.

파 리 재

전마(戰馬)의 중심부(中心部)에 위치(位置)한 파리재는 그 당시(當時)목장(牧場)을 관리(管理)하는 총본부(總本部)가 있었던 곳으로 이곳에 파루를 높이달고 시간(時間)을 알렸으며 관리인(管理人)이 팔인(八人)이 있었음으로 파루재 팔인재의 지명(地名)이 붙었으며 현재(現在) 청소면소재지(靑所面所在地)이다.

샘 봉

파리재 洞(동)쪽으로 파리재를 정면(正面)으로 내려다 보고있는 바위산(岩山)이 있는
데 이 산밑에 석간(石間)에서 맑은 샘물이 나와서 현재(現在)까지도 이 산밑 조그만 마을 샘봉에서는 이 샘물을 식수(食水)로 사용(使用)하고 있다. 또 이 산봉우리에는 북풍(北風)을 막고 남향(南向)을 한곳에 바위(岩石)가 장의자(長椅子)와 같이되고, 양쪽 끝에 팔거리까지 있어서 장수(長壽)마루라고 부른다. 옛날에 전마들에서 한가히 풀을 뜯고 뛰노는 말들을 이곳에서 놀이를 하면서 바라보고 즐겼을 일이 보이는 듯하다.

마 차 미 (馬站)

샘봉의 북(北)쪽 파리재의 동쪽에 자리한 마을을 마차미(馬站)라고 부른다. 백제(百濟)에서 전마들에 군용마(軍用馬)를 먹일 적에 북풍(北風)을 막아주는 가마봉 아래에 솥을 걸고 말죽을 끓여 대는 곳이다. 그후에 이마을 동쪽에 남도(南道)로 내려가는 대로(大路)가 생기고 또 여기서 충청수영(忠淸水營) 즉오천(卽鰲川)으로 가는길이 갈라졌기 때문에 수사(水使)가 서울에서 내려오다가 여기서 쉬어서 요기를 하고 말에게 여물을 먹였다고 해서 말참 즉 마차미라는 동명(洞名) 생겼다고 한다.

뱀 골 (蛇洞)

소재지(所在地) 파리재에서 동북(東北)쪽에 位置(위치)한 이 마을을 남쪽에 가마봉이 우뚝 솟아서 배암이 고개를 든 것 같이 보이고 몸을 틀어 구불구불 돌아간 것이 배암이 서리고 앉은 것 같아서 風水學的(풍수학적)으로 반사혈(盤蛇穴)이라하여 뱀골 또는 蛇洞(뱀동) 사동(巳洞)이라 부르게 되었다. 양천허씨(陽川許氏)의 구기(舊基)였다고 한다.

대 숲 말 (竹下)

소재지(所在地) 파리재에서 西北方(서북방)으로 約(약) 500m 지점(地點)에 마을이 있는데 北으로 얕은 구릉(丘陵)으로 둘러싸이고 앞에는 전마(戰馬)들을 한눈으로 바라보이는 곳의 마을이었으니 이곳을 대숩마을 즉(卽) 대숩말이라고한다. 전마평(戰馬坪)에서 말을 먹일때에 이마을에 대를 길러서 마구(馬具)에 사용(使用)하였으며 또 이곳에 居宅을 지어 직원들의 마을을 이루었던 마을이다. 수안이씨집단촌(遂安李氏集團村)이다.

벗 도 러

현진죽저수지(現眞竹貯水池)의 북편(北便) 대숩말의 서편(西便)인데 현간사지(現 干瀉地)가 생기기 전에는 조수(潮水)로 화염(火焰)을 제작(製作)하였는데 화염(火焰)을 생산(生産)하는 기구(器具)를 벗어라 함으로 벗도러라는 이름이 생겼다.

소리개재

대숩말(竹下村)의 서편(西便) 벗도러의 북편(北便)에 위치(位置)한다. 이마을을 중심(中心)으로 동(東)쪽은 대숩말 서(西)쪽은 송암(松岩)을 연(連)한 작은 구릉(丘陵)이 마치 소리개가 날개를 펴고 앉으려는 형상(形狀)임으로 이같은 이름이 붙었다고한다.

戰馬坪(전마평)과 都美(도미)의 由來(유래)

전마들(戰馬坪) 군용마(軍用馬)를 기르고 백제왕(百濟王) 개로왕(蓋鹵王)이 자주 이곳에 손행(巡行)을 하였는데, 왕(王)이 이곳에 와서 들으니 「都彌(도미)」라하는 목수(木手) 한 사람이 살고 있는데, 그 아내가 천하일색(天下一色)이란 말을 듣고 왕은 욕심이 나서 도미(都彌)의 아내를 뺏으려고 도미(都彌)를 불러 마굿간을 짓게 하고 기한(期限)을 짧게 정(定)하여 왕명(王命)을 어겼다는 죄를 주어 도미(都彌)의 두 눈을 빼고 포구(浦口)에서 조각배에 태워 흘러보내고, 그 아내를 불러 수청(守廳)을 들라하니 그 아내가 웃으면서 말하기를 신하(臣下)된 자로서 한 목수(木手)를 생각하고 왕명(王命)을 거역하겠나이까, 그러나 첩(妾)이 지금 월경(月經)중이므로 삼사일 기한(期限)을 주면 몸을 깨끗이 목욕(沐浴)하고 대왕(大王)을 모시겠나이다 하거늘 왕(王)이 기뻐하며 상(賞)을 후히 주고 집으로 돌려 보냈더니, 그 아내가 집에 돌아와서 즉시 뒷산에 올라가 물길을 자세히 살피고 슬피 통곡(痛哭)한 후에 집에 돌아와서 밤이 깊은 후에 빈배에 올라 썰물에 한없이 흘러갔더니 어느 섬에 도착하였다. 아내가 배에서 내려 동리로 들어가 보니 장님거지하나가 밥을 얻어 먹는데 자세히 보니 그 남편 都彌(도미)였다. 이에 반가이 맞아 배를 타고 고구려(高句麗)로 망명(亡命)하였다. 이 事實(사실)로 하여 都彌(도미)가 살던 포구(浦口)를 도미(都彌), 그후(後)에 도미(都美)라 하여 현 오천면 교성리 도미항(現 鰲川面 校城里 都美港)이고 도미(都彌)의 아내가 생장(生長)한 현도미항(現都美港)앞에 그림 같은 섬을 미인도(美人島)라 하며, 뒤 산(山)은 도미의 아내가 올라가서 남편을 생각하고 슬피 울었다 해서 상사봉(想思峰) 현 오천면 선림사(鰲川面 禪林寺)앞산 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三國史記雜志參照(삼국사기잡지삼조))

교 동 (校洞)

소재지(所在地) 파리재에서 정북(正北)으로 500m지점에 국민학교(國民學校)와 중학교(中學校)가 있고, 그 이웃에 동리(洞里)가 있는데 학교가 있는 마을이라 해서 교동(校洞) 또는 사동(師洞)이라 부른다.

어풍정이(御風亭이)

지금(至今)은 진죽저수지(眞竹貯水池)에 묻혀있지만 전에 금오농장(金烏農場)「간사지」를 막기전에 멍골과 맛차미, 교동 등지에서 흘러가서 바다로 들어가는 곳에 맑은 웅덩이가 있었고 그 옆에 왕(백제왕인 듯 함)이 바람을 쏘이며 들판에 노는 말들을 바라보던 정자(亭子)라 즉 어풍정(御風亭)이라고 하였다.

송 암 (松岩)

소재지인 파리재에서 서(西)쪽으로 3키로 지점(地點)에 진죽저수지(眞竹貯水池)를 안고 앉은 마을을 송암이라 한다. 원래(元來) 동리(洞里) 남(南)쪽이 바다를 향(向)하여 힘차게 뻗어나갔고, 바위가 울룩불룩 솟아있으므로 자룡고모(子龍顧母) 즉 새끼용이 어미를 돌아보는 형상이라 하여 명당자리라고 불리우는 곳으로, 세도(勢道)하는 안동김씨(安東金氏)의 묘(墓)가 있고 그 일대(一帶)가 우거진 소나무로 덮혀 있으며, 묘(墓)아래 깍아지른 절벽(絶壁)에 언제 누구의 소작(所作)인지는 모르나 송암(松岩)이란 글이 새겨있어서 송암(松岩)이라고 부른다.

덩 굴 말

송암(松岩)에서 西北(서북)으로 산을 넘어가면 사방(四方)이 산으로 둘러쌓여 덩굴로 둘러쌓여 있는 것 같은 동리(洞里)를 덩굴말이라고 부른다. 송암(松岩)과 연(連)해 있는 관계로 숲으로 둘려쌓여 있었다고 한다.

짐 박 골

덩굴말 東北(동북)쪽에 새로생긴 마을을 짐박골이라고 부른다. 洞里(동리)가 전부 진흙이라 해서 새로된 마을이라 해서 신리(新里)라고도 부르는데, 전에는 이곳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는데 물가에 참나무로 둘러쌓인 정자(亭子)가 있었다고 한다.

平板(평판)너머

송암(松岩)에서 서쪽으로 산이라고는 할 수 없는 편편한 등성이너머에 동리(洞里)를 平板(평판)너머라고 한다. 원래(元來)는 이 일대(一帶)에 걸쳐 안동김씨(安東金氏)의 풍치림(風致林)지대였었는데, 이 앞에 금오농장(金烏農場)이 생기면서 동리(洞里)가 생겼는데 평판(平板)너머 마을이라 해서 평판(平板)너머라고 한다.

新松里(신송리)

백제(百濟)때는 신촌현(新村縣)에 속한 들과 갈대밭이었다. 신라(新羅)때는 신읍현(新邑縣)에 속했으며 고려(高麗)때는 보령군(保寧郡)에 속했었다. 조선(朝鮮)때에도 보령군(保寧郡)에 속했다가, 조선말엽(朝鮮末葉)에 보령군(保寧郡) 장척면(長尺面)의 地域(지역)인데 1914年 행정구역(行政區域) 개혁(改革)에 따라 중리(中里), 신리(新里), 송동(松洞)을 병합하여 신리(新里)와 송동(松洞)의 이름을 따서 신송리(新松里)라 하여 청소면(靑所面)에 編入(편입)되었다.`95.1월 1일 법률 제4774호로 대천시와 보령군 통합, 보령시 청소면 신송리로 되었다.

소롱굴 (松洞)

청소면(靑所面) 소재지에서 1㎞쯤 떨어진 곳에 자리한 마을이다. 원안동쪽에 자리한 마을인데 조선초엽(朝鮮初葉) 한 지관(地官)이 여기를 지나다가 산세(山勢)가 마치 소가 누운 것 처럼 생겨서, 사람이 심신(心身)을 가다듬을 사람이 많이 나와서 크게 대성(大成)할 곳이라 지목하며 소누운골이라 부르라 해서 그리 부르다가 그후 변해서 소롱골, 송동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원 안 (元安)

소롱골 서쪽에 자리한 마을을 원안(元安)이라고 한다. 본래에는 이 동리 앞에까지 바닷물이 들어와서 청선(靑船) 즉 중국배가 소금을 싣고 들어와서 이 마을에 무성하던 재목(材木)을 싣고 갔다는 전설(傳說)까지 있었는데, 언젠가 이 곳에 원(元)을 막기 시작하였는데 아무리 막아도 둑이 터져서 나중에는 지나가는 객승(客僧)을 제수(祭需)로 넣고 뚝을 막고 堰安祭를 지냈다고 한다. 그후로 언안(堰安)이 원안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참 새 골

원안 북쪽 조그만 산을 넘어가면 조그만 마을이 있다. 이곳에 한 샘물이 있어서 인근 사람들이 여름에 땀띠가 나면 이 샘물에 목욕을 하면 곧 낫는다고 한다. 따라서 이 마을 이름도 찬샘골이라는 의미에서 참새골이라 부르게 되었다.

고 잠 (高岑)

원안 서북(西北)쪽으로 산등성이에 동리(洞里)가 있다. 높은데 앉아서 바다를 바라본다는 뜻에서 고잠(高岑)이라 불렀는데 차차 변해서 고잠이 되었다.

통 미

고잠에서 북쪽에 통을 거꾸로 세운듯한 당산(堂山)이 있고 그 북쪽에 동리가 있으니 이 동리를 통미라고 한다. 원래는 통뫼라고 하였다가 차차 통미로 변하였다. 이곳에 우록 유준근선생(友鹿 柳濬根先生) 묘(墓)가 있다. 선생(先生)은 전주(全州)인으로 본면죽림리(本面竹林里)에서 출생(出生)하였으며, 원래 강직(剛直)하고 기개(氣槪)가 늠름(凜凜)하였으며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이 日人(일인)의 강제(强制)로 이루어졌음을 알고 항일운동(抗日運動)을 일으켜 최면암(崔勉庵), 김복한(金福漢)등과 연락(連絡)하여 동지(同志)를 모아 스스로 유병장(儒兵將)이 되어 西紀(서기) 1806年 丙午(병년)에 홍주(洪州)에서 일군(日軍)과 전투(戰鬪)를 개시하여 三日(삼일)을 싸우고 일군(日軍)에게 체포(逮捕)되어 대마도(對馬島)에 종신형(終身刑)으로 잡혀갔으나 조금도 굴(屈)하지 않고 끝까지 항거(抗拒)하다가 한(恨)많은 세상을 마쳤다.

才井里(재정리)

백제(百濟)때는 신촌현(新村縣)에 속했었다. 신라(新羅)때는 신읍현(新邑縣)에 속했으며 고려(高麗)때는 보령현(保寧縣)에 속했었다. 조선(朝鮮)때에도 보령현(保寧縣)에 속했으며, 조선말엽(朝鮮末葉)에는 보령군(保寧郡) 청소면(靑所面)의 지역(地域)인데, 1914年 행정구역(行政區域) 개혁(改革)때 풍정리(楓井里), 재궁동(才宮洞), 죽림리(竹林里) 일부를 병합하여 재궁(才宮)과 풍정(楓井)의 이름을 따서 재정리(才井里)라 하였다.
`95.1월 1일 법률 제4774호로 대천시와 보령군 통합, 보령시 청소면 재정리로 되었다.

능 동

청소면소재지(靑所面所在地)에서 장항선(長項線) 철로(鐵路)를 타고 북(北)으로 3키로 지점(地點)에 늑적이라고 불리우는 동리가 있다. 이 동리에는 광성부원군(光城府院君) 김극성(金克成), 이분은 광산김씨(光山金氏)로 西紀(서기)1474年 조선 성종5年에 출생(出生)하여 1540年 중종36年에 사망한 분으로, 연산주(燕山州)를 몰아내고 중종(中宗)을 맞이하던 중종반정(中宗反正) 1506年때에 박원종(朴元宗), 성희안(成希顔)등과 같이 참여하여 광성부원군(光城府院君)의 공신호(功臣號)를 받았으며, 중종왕(中宗王)의 신임을 받아 右議政(우의정)에 올랐으며 字(자)는 成之(성지), 號(호)는 靑羅(청라) 憂亭(우정)이라 했고 후에 충정(忠貞)의 시호(諡號)를 받았다)의 묘소(墓所)가 있고 신도비(神道碑)와 제각(齊閣) 있으므로 농골, 능동, 늑적골이라는 이름이 생겼다. 또 이 동리에는 백야김좌진장군(白冶金佐鎭將軍)의 묘소(墓所)가 있다. 장군(將軍)은 안동김씨(安東金氏)로 서기(西紀)1889年 헌종(憲宗) 26年에 충남(忠南)홍성(洪城)에서 출생(出生)하였다. 3.1운동때 만주(滿洲)로 건너가서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를 조직하고 총사령(總司令)이 되어 독립군(獨立軍)을 양성하여 1920年 2月 청산리(靑山里)에서 이범석(李範奭) 나중소(羅仲昭)등과 함께 일본군(日本軍)을 대파(大破)하였고, 그 후에 다시 김혁(金赫)등과 같이 신민부(新民府)를 조직(組織)하는등 조국독립(祖國獨立)을 위(爲)하여 공로(功勞)가 장하였으나, 1930年 1月 같은 동포(同抱)인 공산청년(共産靑年)의 손에 총격(銃擊)을 당(當)하여 만리타국(萬里他國)인 만주(滿洲)에서 한많은 일생(一生)을 마치었다. 이 김장군(金將軍)의 묘소(墓所)에는 매년춘제(每年春祭)로 늑적골 동민이 자비(自費)로 추모제(追慕祭)를 지내고 있다.

냉 정 골 (冷井洞)

소롱골 북동쪽이고 시드물 남쪽에 냉정골(冷井洞)이라 부르는 마을이 있다. 동리(洞里) 윗편 산(山) 기슭에 찬 우물이 있어서 피부병에 좋은 약수(藥水)라 하여 찬우물골, 냉정골이라고 부른다.

시 드 물

냉정골(冷井洞)의 북쪽이고 늑적골의 서북쪽에 시드물이라는 마을이 있다. 이 마을에 공산이씨(公山李氏)의 한 선비가 살고 있는데 풍수학(風水學)에 능통 하였으며, 단풍(丹楓)나무와 백일홍(百日紅)나무를 좋아하며 동리에 단풍나무가 많다하여 풍정(楓井)이라고도 부른다. 공산이씨(公山李氏)의 집단부락(集團部落)이다.

재 경 골

늑적골의 북쪽에 재경골이라 부르는 마을이 있다. 광성부원군(光城府院君) 김극성(金克成)의 재실이 있었다 하여 재경골이라고 부른다.

호 렬 (虎烈洞)

늑적골의 남쪽에 호려울이라는 마을이 있다. 원래 동리가 호리병처럼 생겼다 하여 호리골이라 하다가 후에 변하여 호려울이 되었다.

竹林里(죽림리)

백제(百濟)때는 신촌현(新村縣)에 속했었다. 신라(新羅)때는 신읍현(新邑縣)에 속했으며 고려(高麗)때는 보령현(保寧縣)에 속했었다. 조선(朝鮮)때에도 보령현(保寧縣)에 속했으며, 조선말엽(朝鮮末葉)에는 보령군(保寧郡) 청소면(靑所面)의 지역(地域)으로서 대숲이 많이 있으므로 대숲 또는 죽림리(竹林里)라 하였는데, 1914年 행정구역(行政區域) 개혁(改革)때 의식리(衣食里), 도원리(桃源里), 홍도원리(紅桃源里), 마동(麻洞), 석포동(石浦洞)을 병합하여 죽림리(竹林里)라 하였다.`95.1월 1일 법률 제4774호로 대천시와 보령군 통합, 보령시 청소면 죽림리로 되었다. 五烈士(오열사) 柳濬根(유준근) 先生(선생)의 出生地(출생지)이기도 하다.

석보령이 (石浦)

소재지(파리재)에서 장항선 철로를 따라 5킬로 지점(地點)에 석보령이라는 마을이 있다. 원래 이곳은 고려때에 금광이 성행하였던 곳으로 돌무뎅이가 많고 또 천수만(淺水漫)의 조수(潮水)가 이곳까지 들어와서 포구(浦口)를 이룩하였으므로 石浦(석포)라고 불렀으며, 또 홍주목사가 수영(水營)을 가느라고 그 당시(當時) 대로(大路)를 따라 이곳을 지나다가 보령은 돌모뎅이가 많다하여 석보령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망 골 (麻洞)

소재지(所在地)에서 도로(道路)를 따라 4킬로 지점(地點)에 막은골이라는 마을이 있다. 베옷입은 궁한 선비(布衣塞士)가 산다하여 마동(麻洞)이라고 불렀다하며 또 오서산(烏棲山) 낙맥(落脈)이 앞뒤로 바다까지 흘러나오고, 서북쪽에는 바다로 막혔다고 하여 막은골이라고 부른다. 인천채씨(仁川蔡氏)의 집단부락(集團部落)이다.

아차산약수터

보령군(保寧郡) 청소면(靑所面)과 홍성군(洪城郡) 광천읍(廣川邑)에 경계한 높이
424m의 아차산 중턱에 솟아나오는 약수(藥水)터로 옛날부터 피부병환자와 위장병환자가 끊임없이 이 샘물을 찾았다.

옷 뱀 이

청소면(靑所面)소재지(所在地)에서 북쪽 광천(廣川)을 바라보고 道路(도로)를 따라 6킬로 지점(地點)에 자리한 마을이다. 오천만(鰲川漫)이 띠와 같이 육지(陸地)를 파고 들어와서 廣川邑 독바위에서 바다가 그치는데 독바위와 옷뱀이는 연속(連續)되어있다. 자고(自古)로 광천 독배로 시잡못간 요내 팔자(八字)라고 하였다는 옷뱀이와 독바위는 육상교통(陸上交通)이 발달되기 전까지는 안면도(安眠島)를 위시(爲始)하여 서해(西海) 여러섬의 물화(物貨)의 교역장(交易場)으로 생선을 내다팔고 쌀등 일용품(日用品)을 사들여가는 유일한 곳이었다. 그후 모래가 퇴적하여 독배는 물이 얕아서 배가 들어가지 못하므로, 옷뱀이는 독바위의 구실까지 도맡아서 현재(現在)까지도 생선배가 들어오고 있다. 6.25 피난민의 집단마을이다.

원 죽

죽림리(竹林里)의 원마을이다. 소재지에서 장항선을 따라 북쪽으로 4킬로지점(地點)에 조그만 정거장(停車場)이 있는 마을로, 병자호란(丙子胡亂)때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용감히 싸우다가 전사한 선전관(宣傳官) 인발(印潑)의 살던 곳으로 후손(後孫)이 지금도 이 마을에 살고 있다.

대 숲

죽림리(竹林里)에 자리한 마을이다. 대나무숲이 많다해서 대숲(竹林)이라고 부른다.

피 섬

마동(麻洞) 서(西)쪽에 원래 섬이 있는데 간사지(干瀉地)가 막혀서 지금은 섬이 아니다. 앞이 바다에 면하고 있어 전망이 좋기 때문에 놀이터로 이용(利用)되고 있다. 勢道(세도)하던 안동김씨(安東金氏)의 선대묘(先代墓)가 있다.

홍 도 원 (紅桃源)

청소면소재지(靑所面所在地)에서 약5킬로 북쪽에 산간마을을 홍도원(紅桃源)이라고 한다. 오서산(烏棲山)의 낙맥인 아차산(峨嵯山)을 지고앉아서 도화낙지(桃花落地)의 명당자리라고 한다. 옛날 등짐장사의 집단(集團)인 상무사(商務社)의 공동묘지(共同墓地)가 있는 곳으로 현재(現在)도 상무사수묘막(商務社守墓幕)이 있고 위토(位土)가 있어서 내포육군(內浦六郡)의 상무사원이 정례적으로 집합하여 제사를 지낸다. 전에는 이 곳에 복숭아나무를 많이 심어서 도화낙지(桃花落地)를 실감케 하였다고 한다.

聖淵里(성당리)

백제(百濟)때는 신촌현(新村縣)에 속했었다. 신라(新羅)때는 신읍현(新邑縣)에 속했으며 고려(高麗)초부터 보령현(保寧縣)에 속했었다. 조선(朝鮮)때에도 보령현(保寧縣)에 속했다가, 조선말엽(朝鮮末葉)엔 보령군(保寧郡) 청소면(靑所面)의 지역(地域)이었다 1914年 행정구역(行政區域) 개혁(改革)에 따라 성당리(聖堂里), 청연리, 양지리(陽地里), 음지리(陰地里), 성동(城洞)의 이름을 따서 성연리라 하였다. `95.1월 1일 법률 제4774호로 대천시와 보령군 통합, 보령시 청소면 성연리로 되었다.

단 작 골

청소면소재지(靑所面所在地)에서 오서산(烏棲山)을 바라보고 동쪽으로 약 4킬로 지점
에 저수지(貯水池)가 있으니 성연저수지라고 하는데 그 윗편 남쪽에 자리한 마을을 단작골이라 부른다. 동리앞 조그만 산이 단적(短笛)과 같다고 해서 단적동이 단작골로 변하여 부르게 되었다.

새 재

단작골 북편(北便)에 남향(南向)을 하고앉은 마을을 새재라고 부른다. 뒷산이 봉황쌍무형(鳳凰雙舞形)이라 해서 봉현 또는 새재라고 부른다. 광성부원군(光城府院君) 김극성(金克成)의 후손(後孫)이 세거(世居)하는 마을로 이 마을에 정려(旌閭)가 있으니 출천효자(出天孝子)와 열녀(烈女)의 효행문(孝行文)을 아래에 弁序(변서)한다. 孝子(효자)의 주인공은 光山金氏(광산김씨)로 계환(啓煥), 호(號)는 오은(烏隱)이라 하였으며, 육세(六歲)에 시문(時文)에 통(通)하였으며 자라서는 경사(經事)에 능통하였다. 성균관진사(成均館進士)에 급제(及第)하였으며 지성(至誠)으로 부친(父親)에 효도(孝道) 하던중, 그 부친이 병들어 누워서 꿩을 먹고 싶어하니 꿩을 잡아보려고 개를 데리고 산에 올라갔더니 마침 매가 잡은 꿩을 개가 물어왔으므로 이를 올렸더니 병환(病患)이 좀 快差(쾌차)하였다 하며, 설중(雪中)에 생선을 구하려고 앞 용목을 가보았더니 한곳에 어름이 녹았는데 그 속에서 게가 나와서 봉친(奉親)하였으므로, 이웃사람들이 하늘이 도와서 이런 일이 생겼다고 하여 그 말이 위에서 알게 되어 서기 1832년 純祖(순조) 32年 임진(壬辰)에 특명(特命)이 나리어 정려(旌閭)를 세우게 되었다. 또 계환의 후손(後孫)인 인기의처(寅基의 妻) 백천조씨(白川趙氏)는 그 남편(男便)이 일찍 사망(死亡)하니 아무 기색도 없이 초종장사를 말없이 치루고 슬픈 빛이 조금도 없으므로, 이웃사람들이 의아하였더니 첫 삭망(朔望)을 치루로 나서 그 남편(男便)의 허리띠로 남편의 위패(位牌)를 모신 고인방에서 목을 메어 自殺(자살)하였다. 이 소문이 위에 올라가서 서기 1832年 순조(純祖) 32년 壬辰(임진)에 같이 특명(特命)이 내려졌으므로 같이 정려(旌閭)를 모시게 되었다.

성 골

용못의 동남쪽으로 오서산 중턱에 자리한 마을이 성골이라고 부른다. 동리 뒤 오서산(烏棲山) 중턱에 성터가 있는데 오서산을 둘러싼 산성(山城)터가 부자리만 쌓다가 그만둔 흔적이 역력하고, 성골 뒤에만 좀성으로 불리울만치 성의 흔적이 남아있어서 이곳을 도독의 성이라고 부른다. 속설에는 도적이 쌓았다고도 하지만 사실은 역사에 증명할만한 사실을 가지고 있다.

도독의 성

서기(西紀) 660年 이전에는 신라(新羅) 백제(百濟) 고구려(高句麗)가 똑같이 나누어져 있었으므로 이를 삼국시대(三國時代)라고 부른다. 그러나 서기 660年 백제 의자왕(百濟 義慈王) 20年 김유신(金庾信)이 이끄는 신라군(新羅軍)과 소정방(蘇定方)이 인솔(引率)하는 당군(唐軍)이 도성에 쳐들어와서 義慈王(의자왕)은 항복을 하고 백제는 망하였다. 그해에 당(唐)나라는 백제의 옛땅에 오도독부(五都督府)를 두어 통치를 시작하였다. 이때에 서기(西紀) 661年에 의자왕(義慈王)의 종재(從才)이고 백제에서 좌평(佐平)으로 있던 복신(福信)이 백제의 광복(光復)을 위하여 광복군을 조직하여 일본(日本)에 가있던 의자왕의 왕자 풍(王子 豊)에게 연락하여 일본원군오천(日本援軍五千)을 데리고 신촌현백사장(新村縣白沙場)에 상륙하여 (現 보령군 대천해수욕장으로 이때부터 이곳을 군들이 즉 군입리(軍入里)라고 한다.) 오서산(烏棲山)에 들어가서 산성을 쌓고 본거지(本據地)를 삼으려 하고 이곳에 산성을 쌓기 시작했으나 지세(地勢)가 너무 험하여 완성(完成)을 못하고 이곳에만 좀 쌓았기 때문에 이곳을 도독(都督)의 성(城)이라 하고 그 나머지는 부자리만 놓았을 뿐이다. 그런데 여기 도독(都督)이라 함은 백제성왕(百濟聖王) 2年에(西紀524年) 양고조(梁高祖)에게서 왕호(王號)를 받았는데 그때에 특절도독백제제군사수동장군백제왕(特節都督百濟諸軍事綏東將軍百濟王)의 왕호(王號)로 되어 있으므로 왕(王)을 도독이라고 불렀다.

기 장 단 (旗將壇)

도독(都督)의 성(城)앞에 판석(板石)을 쌓아 국기게양대와 같이 되어 있는곳인데 대장기(大將旗)를 세운 곳이라 하여 기장대라고 한다.

넙 티

성골 남쪽에서 청라면(靑羅面)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넙티라고 부른다. 고개가 넙적하다 하여 넙티라고 부른다. 고개가 넙적한 관계로 개간이 용이하여 재벌가가 들어와서 개간을 하여 농장(農場)과 목장(牧場)이 성행한다.

문 숫 골

승당 동북쪽 오서산(烏棲山) 중봉골짜기에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이 문숫골이다. 옛날에 문수대사(文殊大師)란 고승(高僧)이 이곳에 문수암이란 절을 지어 불도(佛道)를 위하였다 해서 문수골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又萬丈庵(우만장암)이라고도 한다.

빈대절터

성골 동쪽으로 아담한 절터가 있는데 이곳을 빈대절터라고 부른다. 옛날에 이 곳에 절이 있었는데 빈대가 들끓어서 중이 살지못하고 절에 불을 놓고 떠났다 한다. 지금도 이곳에 있는 돌을 들쳐 보면 빈대가 우글거린다고 한다.

산 제 당 (山祭堂)

성골 남쪽으로 오서산산신(烏棲山山神)에게 제(祭)를 지내는 당(堂)이 있는데 이곳을 산제당(山祭堂), 산신당(山神堂)이라고 하며 매년(每年) 이곳에서 산신(오서산 산신은 (女神)이라고 한다)에게 제사(祭祀)를 지낸다고 하며 이산제당(山祭堂)이 있는 골짜기를 산제당골(山祭堂골)이라고 한다.

미 리 재
단작골 서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곳을 미리재라고 부른다. 여기서 청라면(靑羅面)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길마재라고 하며 그 모양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美利峠(미이상)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성연저수지의 수몰지구(水沒地區)가 되어 동리가 저수지 물속에 잠기고 말았다.

승 당 이

새재 동쪽으로 오서산(烏棲山) 골짜기에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성당이라고 부른다. 영정조때 이마을에 도학(道學)이 탁월한 도인(道人)이 살았는데 그 이름은 정혁신(鄭赫臣)이고 호(號)는 성당(聖堂)이라 하였다 한다. 1780년(정조 4년)에 학행으로 천거되어 광릉참봉에 제수 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1790년(정조14)에는 원자 탄생을 기념하여 첨지중추부사에 제수 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그후 보령 청소면 성연리 오서산 기슭에 양성당이라는 서재을 짓고 후진을 양성하면서 조용히 스스로 바른길을 실천하면서 일생을 영위해 나갔다.
1787년(정조11) 호서지방 암행어사 심환지가 본 보령 정혁신의 선비적 생활이 조선왕조실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있다.
"신이 가다가 보령 경계에 이르러 듣건대 오서산 가운데 사인 정혁신 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가난하게 50년을 살면서 글을 일고 도를 배우면서 다른 사람들과 교유하지 않는다고 하기에 신이 몰래 가서 보고는 이어서 유숙하면서 그가 지닌 바를 알아 보았더니 " 중용" 과 "대학"을 많이 읽었는데 나이가 70세에 가까웠습니다.
초가집 6,7칸에서 아들은 농사를 짓고, 며느리는 김을 매어 먹고살면서 산 밖에서 구하는 바가 없었습니다. 이런 사람을 감히 갑작스럽게 경명행수 라고 할 수는 없겠으나, 역시 가난을 견디는 결신의 선비하고 할 수 있으므로 감히 아뢰는 바입니다."
인근사람들이 이분의 교화(敎化)를 많이 받았으므로 이 마을을 성당이라고 하였다 한다.

승 적 골

승당 동쪽으로 골짜기에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승적골이라고 부른다. 성당정혁신(聖堂鄭赫臣)이 이곳에서 수도(修道)하고 이적(異績)을 행하였다 하여 성적골, 승적골이라고 부른다.

양 지 뜸

오서산(烏棲山)에서 내려오는 물줄기가 용못에서 한가운데로 흘러서 진죽천(眞竹川)을 이루고 있는데 용못에서 500m쯤 내려와서 북쪽으로 양지뜸이라고 부르는 마을이 있다. 양지(陽地)쪽에 자리잡고 있다해서 양지(陽地)뜸이라고 부르는 마을로 이 일대(一帶)에는 조선시대(朝鮮時代)로부터 산금지대(産金地帶)로 특히 일제시대(日帝時代)에는 금광이 극성시대(極成時代)를 이루기도 하였다.

음지(陰地)뜸

양지(陽地)뜸의 남쪽에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음지(陰地)뜸이라고 부른다. 동리가 음지쪽에 있기 때문에 음지리(陰地里), 음지뜸이라고 부른다.

용 못

단적골 동쪽에 성골 서북쪽에 맑은 못이 있는데 이 못을 용못이라고 부른다. 층암절벽(層岩絶壁) 아래 맑고 깨끗한 물소리가 끊임없이 들리고 풍경(風景)이 아름다운 곳인데, 옛날에는 이 못 속에 용이 살아서 수도를 하여 하늘로 올라갔다는 전설이 남아있는 곳이다.

청 연

용못의 옆에 동리가 있는데 이 동리를 청연 또 용못이라고 부른다. 맑고 깨끗한 못이 있는 마을이라 하여 청연이란 이름이 지어졌다. 여기서 옛날 보행(步行)을 할 때에는 광천(廣川)에서 청라(靑羅)로 통(通)하는 길이 있고, 또 소재지(所在地)쪽으로 내려오는 길이 있어서 산(山)속이지만 주막(酒幕)이 발달한 곳으로 유명(有名)하였고, 이 마을 뒷편에 복호혈(伏虎穴)이라는 명당자리가 있는데 조선영종(朝鮮英宗)때에 진주유씨(眞州柳氏)로 재령군수(裁寧郡守)를 지낸 유탁연(柳卓然)이란 분을 이곳에 장사지냈는데, 그 후에 그 아들 삼형제(三兄弟)가 대과급제(大科及第)를 하니 이 분이 당시(當時) 남인(南人)이었으므로 노론(老論)에서 역적이 날 곳이라 해서 묘(墓)를 파게하니 묘(墓)안에서 매 한 마리가 날아 나와서 본면 장곡리(本面 長谷里) 매봉재에 앉았으므로 그곳에다가 다시 장사를 지냈다는 전설(傳說)이 있는 곳이다. 지금 청연부락 일부가 貯水池(저수지)의 造成(조성)으로 侵水(침수)되고 있다.

옷 샘

용못에서 서쪽으로 200m쯤 내려가면 맑은 샘물이 있는데 이 샘물을 옷샘이라고 부른다. 샘물이 차서 옻 올린 사람이 이곳에서 목욕을 하면 즉시 낫는다 하여 이와같은 이름이 생겼다 한다.

병풍바위

옷샘옆 개울가에 바위가 병풍을 친것처럼 둘러쳐진 곳을 병풍바위라고 부른다. 옛날에 정성당(鄭聖堂)을 용못과 옷샘 이곳 병풍바위를 오서산하삼절(烏棲山下三絶)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함정모랭이

난적골 서쪽에 있는 모랭이를 함정모랭이라고 부른다. 오서산에서 내려오는 짐승의 길목이 되는 곳으로 옛날 이곳 사람들이 함정을 파놓았으므로 함정모랭이라고 부른다. 또 이곳에 참나무가 무성하였으므로 참나무모랭이라고도 부른다.

井田里(정전리)

백제(百濟)때는 신촌현(新村縣)에 속했었다. 신라(新羅)때는 신읍현(新邑縣)에 속했으며 고려(高麗)때는 보령현(保寧縣)에 속했었다. 조선(朝鮮)때에도 보령현(保寧縣)에 속했으며, 조선말엽(朝鮮末葉)에는 보령군(保寧郡) 청소면(靑所面)의 지역(地域)인데, 1914年 행정구역(行政區域) 개혁(改革)때 신평리(新坪里), 논향동(論香洞), 건정리(乾井里), 어전리(於田里)의 各一部(각일부)와 장척면(長尺面)의 비야평리(飛野坪里) 一部(일부)를 병합하여 건정(乾井)과 어전(於田)의 이름을 따서 정전리라 하였다. `95.1월 1일 법률 제4774호로 대천시와 보령군 통합, 보령시 청소면 정전리로 되었다.

논 향 골 (論香)

所在地(소재지)에서 오서산을 바라보고 3킬로 지점에 북향(北向)을 한 마을이 있다. 옛날에는 이마을에 선비들이 많이 살아서 고담준론(高淡峻論)을 말함으로 마을마다 향기(香氣)가 난다하여 논향이란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느 랏 골

「논양골」에서 소재지(所在地)쪽으로 등성이를 하나 넘으면 동리가 있다. 동리입구에서 한참 들어간다는 의미에서 느랏골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안으로 들어가서 동리가 있다고 해서 안느랏골이라고 부른다.

밧느랏골

「안느랏골」에서 다시 서(西)쪽으로 등성이 하나를 넘어가면 동구(洞口)에서 가까운 곳에 마을이 있는데 이마을을 밧느랏골이라고 부른다. 안느랏골에서 바깥쪽에 있다해서 밧느랏골로 불리워지는 마을이다.

건 정 이 (乾井里)

청소면소재지(靑所面所在地)에서 오서산(烏棲山)을 바라보고 동쪽으로 2킬로 지점에 평지(平地)에 기다랗게 자리한 마을을 건정이라고 부른다. 지금은 청연저수지덕으로 물이 흔하지만 전에는 물이 귀하여 논바닥이 항시 말라있어 건정이란 이름이 붙었다. 동리가 길게 널려져있기 때문에 윗마을 아래 마을을 나우어 윗마을「위겅정리」아래마을을「아래겅정」이로 부른다.

시 거 리

「겅정리」아래쪽에 현재는 소로에 불과하지만 전에는 삼남대로(三南大路)였었고, 또 이곳에서 동못쪽으로 올라가는 큰 길이 있었기 때문에 세거리라고 불리우는 곳이다. 주막(酒幕)이 발달하였으며 관장(官長)의 선정비가 세워지는 곳이기도하다. 현재도 전날에 세워진 선정비가 남아있어서 다 쓰러져 가고 있다.

터진목이

「건정이」에서 북쪽으로 시즈물과 사동을 경계로한 북쪽에 山을 등지고 남향한 마을을 터진목이라고 부른다. 멀리서 보기에는 양지뜸에서 내려오는 山줄기가 그대로 내려오는 듯하나 가까이가보면 시즈물쪽에도 사동쪽에도 조금씩 터져서 통행하기가 용이함으로 터진목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우는 마을이다. 이 마을에 숨은 애국지사가 있어서 빛을 보지 못하는 분이있는데 그 분은 무주김씨(茂朱金氏)로 김사구(金思九)라하여 서기(西紀) 1878年에 出生(출생)하여 서기 1950年에 사망(死亡)하신 분으로 일찍이 나라가 기울어 일본 사람이 우리나라를 침략(侵略)함에 분노하여 서기 1806年 홍주(洪州) 의병(義兵)난에 가담하여 서울 일군헌병대(日軍憲兵隊)에서 이년간(二年間) 옥고를 치르고 출소(出所)하였다가, 기미운동(己未運動)때에 다시 청소면책임자(靑所面責任者)가 되어 항쟁(抗爭)을 하고 다시 一年間獄苦를 치르게되니 자연히 일경(日警)의 요시찰인(要視察人)이 되어 행동(行動)에 주시(注視)를 당하였으나 이에 굴하지 않고 그후에도 진죽역(眞竹驛)에서 도미(道美)까지 일본인(日本人)이 상용으로 도로(道路)를 개설하는데 청소면민에게 비용을 부담시킴으로 선생(先生)이 이에 반대(反對)하여 결국반일운동(結局反日運動)으로 먼저 다시 옥고를 치렀으며 단발반대(短髮反對) 색의장려반대(色衣奬勵反對)등 일생(一生)을 옥중에서 살다가 별세하였는데 애국자(愛國者)로서 빛을보지 못함은 애석한 일이다.

野峴里(야현리)

백제(百濟)때는 신촌현(新村縣)에 속한 들이었다. 신라(新羅)때는 신읍현(新邑縣)에 속했으며 고려(高麗)때는 보령현(保寧縣)에 속했었다. 조선(朝鮮)때에도 보령현(保寧縣)에 속했으며, 조선말엽(朝鮮末葉)에는 보령군(保寧郡) 장척면(長尺面)의 지역(地域)인데, 1914年 행정구역(行政區域) 개혁(改革)때 통곡리(桶谷里), 내곡리(來谷里), 석반리(石磻里), 남현리(南峴里), 비야평리(飛野坪里)의 各一部(각일부)와 청소면(靑所面)의 어전리(於田里) 일부를 병합하여 비야평(飛野坪)과 남현(南峴)의 이름을 따서 야현리(野峴里)라 하여 청소면(靑所面)에 편입(編入)되었다.`95.1월 1일 법률 제4774호로 대천시와 보령군 통합, 보령시 청소면 야현리로 되었다.

비 얏 들

청소면소재지(靑所面所在地)에서 동쪽으로 500m내지(內至) 1킬로지점에 평지에 띄엄띄엄 아담한마을이 비얏들이라 불리우는 마을이다. 이 마을 앞山이 풍수학(風水學)으로 춘안북귀형(春雁北歸形) 즉 꼼기러기가 북으로 돌아가는 형용이라 하고, 이 마을은 평사낙안(平沙落雁) 즉 평소 한들에 기러기가 점점이 나리는 형용이라고 하여서 비아들(祀雅들)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나주김씨(羅州金氏)의 세거(世居)부락이다.

통 골

「비얏들」의 남쪽에 양쪽 산이 통처럼된 골짜기에 마을이있는데 이마을을 통(通)같이 생긴 마을이라해서 통골이라고 부른다. 이 마을을 해주오씨(海州吳氏)와 영월신씨(寧越辛氏)가 다같이 세거(世居)하고 있는데 오씨가(吳氏家)에서는 효자(孝子)가 나서 정여(旌閭)를 세웠고, 신씨가(辛氏家)에서는 열여(烈女)가 나서 旌閭(정려)는 세우지 아니하였으나, 그 자손(子孫)이 성균관(成均館)에서 내려온 발선문(跋選文)을 보관하고 있어서 서로 가문을 빛내고 있다. 여기 양가(兩家)의 발문(跋文)을 기록(記錄)한다.
해주오씨효자발문(海州吳氏孝子跋文) : 오재현(吳載顯)은 그 부친(父親)을 계승하여 효행(孝行)에 널리 알려져 있더니 마침 그 모친(母親)이 병(病)이 나매 지성(至誠)으로 봉양하나 효과(效果)가 없더니 그 모친(母親)이 수박을 먹고싶다고 하는데 그때는 마침 겨울임으로 수박을 얻을 도리가 없어서 사방(四方)으로 수박을 얻으려고 돌아다니던중 하늘이 도와주시어 어느 山밑에 낙엽이 쌓인 사이로 수박넝쿨이 말려있으므로 들추어 보았더니 그안에 수박이 한통 잘 익어 있었다. 그것을 가지고 돌아와서 그 모친(母親)에게 바쳤더니 그후로 모친(母親)의 병이 쾌차하시었다. 당시에 유림(儒林)들이 이 사실(事實)을 알고 추천을 하여 모성공회(母聖公會)의 발천(跋薦)을 얻어 旌閭(정려)를 세우게 되었다.

孔夫子誕降(공부자탄강) 2477年 月 日 (西紀(서기) 1926年)

旌閭所在地(정려소재지) 保寧郡(보령군) 靑所面(청소면) 野峴里(야현리)

管理人(관리인) 吳韓益(오한의)(現(현) 靑所副面長(청소부면장) 吳東一(오동일) 父親(부친))

영월신씨가발문(寧越辛氏家跋文)

보령군 청소면 야현리(保寧郡 靑所面 野峴里) 열녀창원황씨(烈女昌原黃氏)는 辛允敎(신윤교)의 처(妻)로 그 성품이 본시 정숙하고 부도(婦道)가 완비(完備)하더니, 그 남편이 병들어 병세가 침중하매 장차 급한지라 스스로 손가락을 잘라 입에 흘려 넣으니, 이로부터 회생(回生)하여 삼년을 더 살다가 병으로 누워 급하니 다시 손가락을 잘라 흘려 넣었으나 이미 천명이 다한지라 별세(別世), 부인이 심히 애통해 하며 초종장례(初終葬禮)를 극진히 치르고 삼년복상중(三年服喪中) 얼굴을 씻지 아니하고 머리를 빗지 아니하였으며, 一生(일생)동안 근신(謹愼)하고 종신(終身) 토록 변(變)치 아니하였으므로 儒林(유림)들이 알고 문묘(文廟)에 전달(傳達)하여 跋文(발문)을 내리어 정려(旌閭)을 세울 것을 전하노라. 이 발문보관자(跋文保管者)는 孔夫子誕降(공부자탄강) 2474年 癸亥(계해) 四月(사월) 日 (서기1923年) 前(전) 靑所面(청소면) 副面長(부면장) 辛奎鉉(신규현)(黃氏(황씨)의 子)

따 불

통골 남(南)쪽 산골짜기에 자리한 마을을 따불이라고 부른다. 진당산(眞堂山)은 옛날에는 이 山이 서해고급봉화초삼진(西海告急烽火硝三鎭)이라해서 산봉(山峰)에 봉화대(烽火臺)가 있었다. 아래에 조그만 마을로 옛날에는 진당산당각시를 위하는 산제당(山祭堂)집이 있었다고 한다. 山골이라 따부를 일러먹는 마을이라 하여 따부골 즉 따불이라고 한다.

가루고개

통골 남서(南西)쪽에 있는 조그만 고개를 가루고개라고 한다. 원래 풍수학(風水學)으로 갈우음수형(渴牛飮水形) 목마른 소가 물을 마시는 형용)이란 뜻에서 갈우고개라고 불러왔는데, 그후 이 고개 南쪽에 한 처녀(處女)가 고개북쪽에 사는 한 선비를 짝사랑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는데 죽을때에 내가 죽거든 갈우고개에 묻어달라 그 선비가 다니는 길에 묻히겠다는 뜻인데, 그 부모(父母)가 이 가루고개에 시체를 가로 묻어서 다시한번 가루고개를 실감(實感)케 하였다는 슬픈 에피소드가 있는 고개이다.

남 망 재

청소면소재지(靑所面所在地)에서 남방(南方)으로 500미터 지점에 조그만 언덕이 있고 그 밑에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남망재라고 부른다. 남쪽 재밑에 있는 마을이라 해서 마을이름을 남망재, 남현(南峴)이라고 부른다.

새남망재

남망재 서남(西南)쪽에 山등성이를 넘어가서 서향(西向)한 마을을 새남망재라고 부른다. 남망재보다 새로이된 마을이라해서 새남망재라고 부른다. 이 동리앞에 큰 팽나무가 있는데 둘레가 네아름이나 되는 수령(樹齡) 400년이 넘는 팽나무로 지방문화재(地方文化財)로 보호를 받고 있다.

돌 반

새남망재에서 西北(서북)쪽으로 학이 나래를 펴고 물을 마시러 내려앉으려는 듯이 보이는 山아래에 조그만 마을을 돌반이라고 한다. 온 마을이 바위로 반석(盤石)을 이루고 있다고 하여서 돌반이라고 부른다.

서두물들

비얏들 서남(西南)방에 널려있는 들을 서두물들이라고 한다. 원래 물이 귀하여 소가 먹을 물도 드물다는 뜻에서, 소도 물을 달라고 하였다 해서 소두물, 서두물들이 되었드나 지금은 청연저수지가 되어 옥토가 되었다.

長谷里(장곡리)

백제(百濟)때는 신촌현(新村縣)에 속하였고 신라(新羅)때는 신읍현(新邑縣), 고려(高麗)때는 보령현(保寧縣)의 속지(屬地)였으며, 조선(朝鮮)때에도 보령현(保寧縣)의 속지였다가 조선말엽(朝鮮末葉)에는 장척면(長尺面)의 속지(屬地)였다. 그후(後) 1914年 행정구역(行政區域) 개혁(改革)에 따라 장자울(長者울), 조곡(鳥谷), 새울을 합하여 장곡리(長谷里)라 하며 청소면(靑所面)에 속하고 장자울, 새울, 망선동, 터꼴, 신촌등이 관할구역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95.1월 1일 법률 제4774호로 대천시와 보령군 통합, 보령시 청소면 장곡리로 되었다.

장 자 울

청소면소재지(靑所面所在地)에서 남서(南西)쪽으로 3킬로지점에 산세(山勢)가 아담한 마을이 장자울이다. 원래 이 마을에 장자(큰부자)가 살았는데 하도 손님이 많이와서 심부름하기에 진력이 난 비부(婢父)가, 객승(客僧)의 말을 듣고 집앞의 우물에 제아비의 해골을 묻은 후로 그 부자가 망하였다는 전설이 있는 마을이다.

망 선 동

장자울 남쪽에 조그만 등을 넘어 마을을 망선동(望仙洞)이라고 부른다. 이 망선동 남쪽 끝에 매봉재라는 곳이 있는데 성연리(?amp;#27263;里) 용못에서 진주유씨(晋州柳氏)의 묘(墓)를 파니 매가 날아와서 이 산(山)에 앉았으므로 매봉재다. 이곳에 묘(墓)를 들였으므로 이 산(山)을 매봉재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망선동에서 전주유씨가 세거(世居)하였으므로 매봉재에 산소(山所)를 모신후에 현인이 나기를 기다린다해서 망선동(望仙洞)이라고 부른다.

새 울

장자울 서쪽에 새울이라는 마을이 있다. 동리가 새형용으로 되었다고 하여 새울(鳥谷)이라고 부른다. 이 마을에서 새같이 보이는 산은 서쪽으로 뻗어서 무네미로 연(連)하게 되었다.

무네미고개

새울에서 서쪽으로 산등을 타고 500미터쯤 내려가면 山줄기가 끊어진 것처럼 보인다. 산밑에는 작은 다랭이논이 있고 논 저쪽에는 산이 구불구불 돌아나가는 것이 보이는데 이곳을 무네미라고 부른다. 토정비결(土亭秘訣)의 작자(作者) 이지함(李之函)의 (서기1517년에 出生(출생) 호 토정(號 土亭)이 오서산(烏棲山)에서부터 산세(山勢)를 따라 여기까지 왔는데, 산이 끊어져서 더 갈수가 없음으로 망설이고 있었더니 앞에 밭에서 밭을 갈던 한 노인(老人)이 소를 몰며 이토정(土亭)같이 미련한 소야 한번 뛰면 되지 않느냐 하는 말을 듣고 비로소 깨달아 그 건너(鰲川面) 돌고개 뒷산을 접어들어 지금(至今)의 고정리(高亭里) 周浦面(주포면)에 신위지지(神位之地)를 정하였다는 유명한 전설(傳說)이 있는 곳이다.

터 꼴

청소면소재지(靑所面所在地)에서 서남(西南)쪽으로 1킬로쯤 되는 곳에 북쪽을 바라보고 앉은 마을이 터꼴이다. 金烏農場(금오농장)이 생기기 전에는 이 동리(洞里)앞에까지 갯물이 들어왔는데, 생선(生鮮)배가 들어오면 지방양반들 텃세를 받았다 하여 터꼴이라고 부른다.

신 촌

터꼴에서 서쪽으로 1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 신촌이란 새로 지은 마을이 있다. 원래에는 집이 없었는데 운현궁(雲峴宮 : 興宣大院君(흥선대원군) 生家(생가))이 이곳에 바다물을 막고 농장을 개설하여 한두집 생기게 되고 그 후에 두차례나 그 앞바다가 막혀서 논이 되었으므로 지금은 들 가운데에 있는 풍요한 마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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