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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령의 문화

보령의 문화 글의 상세내용
제목 주포면
구분 지명유래
내용 周 浦 面 (주포면)

백제(百濟)때는 신촌현(新村縣) 사촌현(沙村縣)에 속했었다. 신라(新羅)때는 신읍현(新邑縣)에 속해서 결성군(潔城郡)의 영현(領縣)이였으며 고려(高麗)때는 보령현(保寧縣)에 속해서 홍주에 붙었었다. 조선(朝鮮)때에도 보령현(保寧縣)에 속했으며 이조말엽(李朝末葉)엔 주포면(周浦面)에 속했었다. 1914년 행정구역(行政區域) 개혁(改革)때에 원당(元堂)외 25개 동리(洞里)와 장척면(長尺面)의 구수(九水)외 7개 동리(洞里)와 목충면(木忠面)의 사동(砂洞) 외 13개 동리(洞里)와 오천군(鰲川郡) 천동면(川東面)의 산수동(山水洞) 일부를 병합하여 다시 주포면(周浦面)이라하여 고정(高亭) 송학(松鶴) 은포(隱浦) 주교(舟橋) 관산(館山) 봉당(鳳堂) 신성(新城) 마강(馬江) 관창(寬倉) 신대(新垈)의 10개리(個里)로 개편 관할하여 보령군(保寧郡) 주포면(周浦面)이라 불렀었다. 그후 1962年 11월(月)에 신성리(新城里)를 보령군청(保寧郡廳)이 있었던곳이므로 보령리(保寧里)라고 고쳤다. `95년1월 1일 법률 제4774호로 대천시와 보령군 통합, 보령시로 되었다.

保寧里(보령리)

백제(百濟)때는 신촌현(新村縣)에 속했었다. 신라(新羅)때는 신읍현(新邑縣)에 속했으며 고려(高麗)때는 보령현(保寧縣)에 속했었다. 이조말엽(李朝末葉)엔 보령군(保寧郡) 주포면(周浦面)의 지역(地域)으로서 보령군청(保寧郡廳)이 있었으므로 읍내(邑內)라 하였는데 1914年 행정구역(行政區域) 개혁(改革)때 원당리(原堂里) 사청리(射廳里)의 각(各) 一部와 장척면(長尺面)의 상리(上里) 하리(下里)의 각(各) 일부를 병합하여 보령군(保寧郡)의 옛이름 신성(新城)을 따라 신성리(新城里)라 하였다가 1962年 11월(月)에 보령리(保寧里)로 고쳤다. 옛날에 보령군청(保寧郡廳)이 있었는데 1914年에 대천(大川)으로 옮겨갔고 현재는 周浦面(주포면) 所在地(소재지)로 되어있다.`95년1월 1일 법률 제4774호로 대천시와 보령군 통합, 보령시 주포면이 되었다.

鄕校(향교)말

「성재」동남(東南)쪽에 자리한 마을을「향교말」이라고 부른다. 보령향교(保寧鄕校)가 있는 마을이라「향교말」이라고 부른다. 또한 향교촌(鄕校村)이라고도 부르며 마을 뒷산은 향교산(鄕校山)이라고 부른다.

진당산

보령리, 마강리와 청라면계에 있는 옛보령현의 진산이고 옛성터와 봉화대터가 있으며 한말의 현관으로 국치를 당하자 홍성, 경성등지에서 일의병장으로 국전회복에 전력하다 권상으로 순국하신 직각 김상덕선생과 증숙부인 서씨, 중숙부인 송씨, 숙부인 이씨, 측실이신 여류명사 한운여사묘가 있다. 진당산록에는 진당초라고 하는 난과식물이 자생하고 있다.

海山縷(해산루)

「성재」북쪽에 자리한 누각(樓閣)을 해산루(海山縷)라고 부른다. 또한 성(城)의 남쪽에 있어서 남문(南門)이라고도 한다. 보령성(保寧城)의 정문(正門)으로 건립된 누각인데 팔작(八作)지붕에 정면(正面) 세칸(三問) 측면(側面) 두칸(二問)의 누각이다. 이씨조선(李氏朝鮮) 인조(仁祖) 60年경(1610)에 창건하였다. 현판(懸板)은 이곳 출신인 영의정(領議政) 이산해(李山海)가 썼다.

배치산(湃峙山)

「성재」남(南)쪽으로 산이 있는데 이산을 「배치산」이라고 부른다. 옛날에는 이산 아래까지 바다가되어서 배를 매었다 하여 「배치산」이라 부른다.

질 재

보령리(保寧里)에서 청라면(靑羅面) 장산리(長山里)로 넘어가는 고개를 「질재」라고 부른다. 고개가 긴 고개인데 옛날 싸움이 있을 때 군사들이 진을 쳤다해서 「진재」라고 불렀다 한다. 또한 일설로는 고개가 긴 재라 「긴재」라 부르다가 「질재」라 변하여 부른다. 이 재의 이름을 따서 조선(朝鮮)때는 장척면(長尺面)이였다가 1914년에 주포면(周浦面)에 편입되었다.

保寧里(보령리)

보령리(保寧里)를 옛날에는 신성리(新城里)라고 불렀었다. 조선(朝鮮)때에 성(城)을 새로 쌓았다 해서 신성리(新城里)라 불렀었다.

塔 山(탑산)

상리(上里) 동(東)쪽 진당산(鎭唐山)아래에 자리한 산을 탑산(塔山)이라고 부른다. 산에 석탑(石塔)이 있었다 해서 탑산(塔山)이라고 부른다. 현재 이탑은 보령중학교 교정에 옮겨 세워져 있다.

중 리

보령리(保寧里)에서 중심에 자리한 마을을 중리(中里)라고 부른다.

장승배기

중리(中里)북쪽으로 자리한 길을 「장승배기」라고 부른다. 길옆에 장승이 박혀있다 해서 「장승배기」라고 부르는데 팽나무 정자가 있는 길이다.

성 재

「향교말」서북(西北)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성재」라고 부른다. 옛날부터 보령읍성(保寧邑城)이 있었던 곳이라「성재」라고 부른다.

삼시랑당굴

「질재」아래 북(北)쪽으로 골짜기가 있는데 이 골짜기를 「삼시랑당굴」이라고 부른
다. 삼신을 위하는 신당(神堂)이 있었던 골짜기라 「삼시랑당굴」이라고 부른다.

보령향교나무

보령향교(保寧鄕校)에 회화나무가 있는데 이 나무를 「향교나무」라고 부른다. 나무 둘레가 다섯아름되는 나무로서 수령이 300년이 넘는 나무다.

東軒(동헌)터

「성재」북(北)쪽에 보령현(保寧縣)의 동헌(東軒)이 있었던 터가 있다. 현재 보령중학교(保寧中學校)자리가 옛 동헌(東軒)이 있던곳이다.

客舍(객사)터

「성재」중앙에 옛날 보령현(保寧縣)의 객사(客舍)터가 있따. 지금 周浦國民學校(주포국민학교)가 서있는 자리가 옛 객사(客舍)가 있었던 자리다.

馬江里(마강리)

백제(百濟)때는 신촌현(新村縣)에 속했으며 신라(新羅)때는 신읍현(新邑縣)에 속했었다. 고려(高麗)때는 보령현(保寧縣)에 속했으며 조선(朝鮮)때에도 보령현(保寧縣)에 속했었다. 이조말엽(李朝末葉)엔 보령군(保寧郡) 장척면(長尺面)의 지역(地域)인데 1914年 행정구역(行政區域) 개혁(改革)때 내강리(內江里) 외강리(外江里) 마명리(馬鳴里)와 구수동 상리(上里) 망선동(望仙洞)의 各一部와 오천군(鰲川郡) 천동면(川東面) 산수동(山水洞) 일부를 병합하여 마명(馬鳴)과 내강(內江)의 이름을 따서 마강리(馬江里)라 하여 주포면(周浦面)에 편입(編入)되었다. `95년1월 1일 법률 제4774호로 대천시와 보령군 통합, 보령시 주포면이 되었다.

말우리

「밧강수리」서(西)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말우리」라고 부른다. 조선(朝鮮)때에 청연역(靑연驛)의 말을 이 곳에서 길렀는데 말 우는 소리가 늘 울렸던 마을이라 「말우리」라 불렀다 한다. 마명(馬鳴) 마명리(馬鳴里)라고도 부른다.

안강수리

「강수리」안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안강수리」라고 부른다. 「진당산」아래에 자리한 마을인데 약수(藥水)가 나오는 곳에 자리해 있어 이곳 약숙(藥水)를 마시면 장수를 한다고 전해오는 약수터가 있는 마을이다.

九水洞(구수동)

「밧강수리」서(西)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구수동(九水洞)이라고 부른다. 마을주위에 아홉 개의 산계곡이 있어 그 계곡에서 흐르는 물이 마을앞으로 흐른다 해서 구수동(九水洞)이라 부른다.

감투봉

「안강수리」동(東)쪽으로 산이 있는데 이 산(山)을 「감투봉」이라고 부른다. 산 모
양이 감투처럼 생겼다 해서 「감투봉」이라고 부른다.

강수리

「안강수리」바같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강수리」라고 부른다. 마강리(馬江里)에서 으뜸되는 마을인데 큰 산 아래에 자리해 있는 마을이다.

대섭말

「강수리」바같쪽에 자리한 마을을 「밧강수리」라 부르고 「밧강수리」남(南)쪽에 있는 마을을 「대섭말」이라고 부른다. 대숲이 있는 자리에 마을이 있다해서 「대숲말」이라 부르다가 「대섶말」이라고 변해서 부른다.

여壇터(여단터)

「밧강수리」옆에 여단(여壇)터가 있다. 옛날 보령현(保寧縣)의 여단(여壇)터인데 지금은 묘(墓)가 되어서 남아있다.

鳳堂里(봉당리)

백제(百濟)때는 신촌현(新村縣)에 속했었다. 신라(新羅)때는 신읍현(新邑縣)에 속했으며 고려(高麗)때는 보령현(保寧縣)에 속했었다. 조선(朝鮮)때에도 보령현(保寧縣)에 속했으며 조선말엽(朝鮮末葉)엔 보령군(保寧郡) 주포면(周浦面)의 구역(區域)인데 1914年 행정구역(行政區域) 개혁(改革)때 원당리(原堂里) 사청리(射廳里)의 각(各) 一部와 장척면(長尺面)의 고남리(古南里) 도랑당리(道郞堂里)하리(下里) 일부를 병합하여 봉당성(鳳堂城)의 이름을 따서 봉당리(鳳堂里)라 하였다. `95년1월 1일 법률 제4774호로 대천시와 보령군 통합, 보령시 주포면이 되었다.

고나미

사청(射廳) 서북(西北)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고나미」고남(告南) 고남리(古南里)라고 부른다. 옛날 원님이 북쪽에서 살다가 이 부락 남쪽으로 와서 살게 되었다 해서 남쪽에 원님이 있다 해서 「고남」「고나미」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원댕이

사청(射廳)의 동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원댕이」라고 부른다. 옛날 유명한 도학자(道學者)가 태어난 마을이라 그 학자의 호(號)가 종승당인데 「종승당」이 유명한 학자가 된 원 마을이라 해서 「원당이」라고 부르다가 「원댕이」「원당」「원당리」라고 부른다 한다.

사청(射廳)이

「원댕이」서(西)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사청(射廳)이라고 부른다. 조선(朝鮮)때에 사창(社倉)이 있었고 활을 쏘던 곳이라하여 사청(射廳)이라고 부른다. 또한 「새챙이」「사청리」라고도 부른다.

도랑댕이

「射廳이」북(北)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도랑댕이」라고 부른다. 옛날엔 도랑당(道郞堂)인 신당(新堂)이 있었다 해서 「도랑당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도랑댕이」라고 부른다.

미력잇들

「도랑댕이」와 「사청이」사이에 들이 있는데 이 들을 「미력잇들」이라고 부른다. 들에 미륵이 있었다 해서 「미륵잇들」이라 부르다가 변하여 「미륵잇들」이라 부른다.

벌 뜸

「사청이」북쪽에 있는 큰 뜰을 「벌뜰」이라고 부른다. 「벌들」가운데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벌뜸」이라고 부른다.

社穆(사직)집터

「사청」동쪽으로 「사직집터」가 있다. 조선(朝鮮)때 보령현(保寧縣)의 사직(社穆)집터다

유투쟁이보

「고나미」동(東)쪽으로 보가 있는데 여기를 「유투쟁이보」라고 부른다. 버드나무 정자가 있었던 보다.

주포말

「사창이」동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주포(周浦)말이라고 부른다. 이 마을의 이름을 따서 주포면(周浦面)이라 하였다.

古南山城(고남산성)

보령성(保寧城)에서 남(南)쪽으로 3㎞지점에 자리한 토성(土城)이 고남산성(古南山城)이다. 보령현(保寧縣)을 보호하기 위하여 이씨 조선(李氏朝鮮) 정종(正宗) 2年(1400)에 築城한 성이다. 지금은 대개 허물어져 있으나 성의 주위가 약486m이며 봉당산성(鳳堂山城)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館山里(관산리)

백제(百濟)때는 신촌현(新村縣)에 속했었다. 신라(新羅)때는 신읍현(新邑縣)에 속했으며 고려(高麗)때는 보령현(保寧縣)에 속했었다. 조선(朝鮮)때에도 보령현(保寧縣)에 속했으며 이조말엽(李朝末葉)엔 보령군(保寧郡) 주포면(周浦面)의 지역(地域)인데 1914年 행정구역(行政區域) 개혁(改革)때 관촌(館村) 이목동(梨木洞)과 명계리 (鳴鷄里) 산천리(山川里)의 각일부(各一部)를 병합하여 관촌(館村)과 산천(山川)의 이름을 따서 관산리(館山里)라 하여 주포면(周浦面)에 편입(編入)되었다. `95년1월 1일 법률 제4774호로 대천시와 보령군 통합, 보령시 주포면이 되었다.

장승배기

「관말」서(西)쪽으로 「장승배기」라고 부르는 길이었다. 길 옆으로 장승이 박혀 있다해서 해서 「장승배기」라고 부른다.

솔서당

「관말」북(北)쪽으로 성황당(城隍堂)이 있는데 여기를 「솔서당」이라고 부른다. 큰 소나무가 서 있다.

산냇골

「관말」동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산냇골」이라고 부른다. 산 안쪽으로 자리해서 마을 경치가 좋은곳이라 「산냇골」「산천리」라고 부른다.

배나뭇골

「관말」북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배나뭇골」이라고 부른다. 배나무가 서
있는 마을이라 옛날부터 「배나뭇골」이라고 부른다.

도청이

「관말」서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도청이」도청리(都廳里)라고 부른다. 옛날 나라의 많은 관청(官廳)이 앉은 곳이라하여 그때부터「도청이」「도청리」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마을이다.

관 말

「배나뭇골」남(南)쪽에 자리한 마을을 「관말」이라고 부른다. 조선(朝鮮)때에 여기에는 조선고종의 妃 명성황후민씨의 부친, 벼슬은 僉政을 지내고 1866年(고종3년)에 고종의 장인이 되었으며 후에 영의정 여성부원군에 추증봉군을 받은 민치록묘와 신도비가 있다. 금정도역승(金井道驛丞)에 딸린 청연역(靑연驛)이 있었다. 「관촌」「역말」「역촌」이라고도 부르는 마을이다.

驛 峠(역티)

관산리(관산리)에 역티(驛峠)라는 고개가 있다. 조선(朝鮮)때에 관원(官員)들이 말을 타고 넘어다닌 고개라하여 역티(驛峠)라고 부른다.

연지리

원래오천면 갈현리 지역인데 1984년 2월 연정지동(蓮亭芝洞)과 갈두(葛頭)의 일부를 합하여 연지리라 하고 주포면에 편입되었다.
(마을) 연적골, 칡머리, 가줄, 밤까시

가줄

칡머리 남쪽에 있는 마을로 가자울 芝洞, 枝洞이라고도 부른다. 마을 지형이 가재와 같으며 지초가 많은 마을이라 그리 부른다.

연젓골

칡머리 북동쪽에 있다. 연정동(蓮亭洞)이라고도 부른다. 마을에 연화정(蓮花亭) 수형(水形)의 명당이 있으며 옛날에 연정(蓮亭)이 있었으므로 연정동이라고 부른다.

칡머리

가줄 북쪽에 있다. 葛頭라고도 부른다. 태봉산아래에 있으며 칡이 많아 그리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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