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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령의 문화

보령의 문화 글의 상세내용
제목 명신 이준경
구분 역사인물
내용 이조(李朝) 선조(宣祖)때의 명신(名臣) 이준경(李浚慶)

이조(李朝) 선조(宣祖)때의 명신 이준경(李浚慶)은 보령(保寧)에서 태어났다. 그는 연산군(燕山君) 5년 (1499)에 이수정(李守貞)의 아들로 태어나서 자는 원길(原吉)이고 호는 동고이며 시호는 충정이다.

본관은 광주(廣州)로서 연산군(燕山君) 10년(1504)에 갑자사화(甲子士禍)로 조부와 함께 화를 만났으나 다행히도 무사하였다. 그는 어렸을때부터 열심히 공부를 하였는데 어려서는 모친으로부터 효경대학(孝經大學)을 말로 배우고 자라선 황효헌(黃孝獻)에게도 글을 배웠으며 종형 이연경(李延慶)으로부터 성리학(性理學)을 배웠다.
중종(中宗) 26년(1531)에 문과에 급제하고 부수찬(副修撰)에 등용되었다가 1533년 사경으로서 기묘사화(己卯士禍)때 죄인의 무리를 논했다가 김안로(金安老)등 삼간에게 미움을 사서 파직되어 그들이 1537년에 사사된 후에 다시 기용되었다. 그후 승지를 거쳐 직제학(直提學) 부제학(副提學)을 역임하고 1543년에 문신정시(文臣庭試)에

장원 그리고 한성부윤에 오르고 대사성을 지냈다.

그는 근면하고 사리판단이 정확해서 여러 동료들로부터도 차츰 수재로 인정받게 되며 후덕하여 남달리 다른 사람들의 인품도 존중하나 사리에 어긋나는 사람들에겐 용서치 않았다. 그후 형조참판 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 병조판서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을 거쳐 명종(明宗) 5년(1550)에 대사헌이 되었다. 그가 병조판서로 있을 때 이기(利己)가 뇌물을 받고 구관자(求官者)의 이름을 적어 보내어 등용해줄 것을 청했으나 이를 거절했던일이 있었는데 이기(李기) 임백령(林白齡)등의 미움을 받고 외직으로 밀리게 되어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가 되었으나 그는 불평하지 않고 선정을 베풀어 특히 농민들로부터 잘 고른 관찰사라는 칭호를 받을만큼 그들의 존경하는 인물이 되었었다.

그러나 끝내 이기(李기)의 미움속에 그 일당인 이중강(李重彊)의 탄핵을 받고 윤임(尹任) 일파로 몰려 보은(報恩)으로 귀향가게 되었다. 그는 보은(報恩)으로 귀양가서는 조정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권력싸움에 말려들기가 싫어서 자기의 이름도 잊혀질 것을 갈망했었다.

조정에서는 이기(李기)를 비롯한 일파들이 권력잡기에 급급할 때 순순이 따르지 않았으므로 귀양까지 오게 되었으나 그는 크게 한탄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생각하기를 반드시 지금의 궁중 세력판도는 오래가지 않을 것을 알았으므로 그는 오히려 이렇게 쉬는 것도 편안하다 느긋하게 마음을 먹고 있었다. 하기야 한사람의 권력이 오래갈수록 끝내는 피를 부르게 되는 것이라고 듣고있던 이준경(李浚慶)은 피를 흘리지 말어야 된다고 사류 들에게 말하긴 했었다. 그가 귀양살이 왔다가 얼마 안가서 이기(李기)가 벼슬에서 물러난 후 그는 지중충부사로 다시 등용되었다.

1553년엔 함경도지방(咸鏡道地方)에서 야인들이 침범해온 일이 있었다. 조정에서는 그를 함경도순번사로 임명하여 토벌토록 하자 그는 바로 나가서 야인들을 토벌했다.
1555년 왜구들이 호남지방(湖南地方)에 몰려와선 재물을 약탈했었다. 그는 전라도순찰사(全羅道巡察使)가 되어 이를 격퇴하자 그의 신망은 굳건해지며 돌아와선 우찬성(右贊成)겸 벼조판서가 되었다. 그후 1558년엔 우의정이 되고 1560년엔 좌의정이 되었다.

그는 차분하게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아끼니 여러사람으로부터 추대되는 영상에 오르게된 것이다. 1567년엔 명종(明宗)이 마지막 눈을 감을 때 오랫동안 어머니와 외숙부 윤원형(尹元衡)의 권력에 찌눌렸던 명종(明宗)이 오직하나 대담하게 국사(國事)에 임하여 공을 세웠던 이준경(李浚慶)을 불러 침상에서 눈물을 흘리니 이준경(李浚慶)도 울면서 그동안의 정을 나누었다. 가는 자와 남는 자가 그동안의 말못하였던 정을 나누는 석별의 정이었다고들 말한다.

이준경(李浚慶)은 왕통을 이을 후계자로 정하기를 청해서 중전(中殿)에게 의논하여 하성군(河城君)으로 정하고 맞아들여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이 하성군(河城君)이 선조(宣祖)다. 그는 선조(宣祖) 1년(1568) 영상으로서 국사를 다스릴 때 신진사류와 기성사림과의 알력을 조정하려 하였다가 신진사류의 정적이 되었으나 그는 꿋꿋했다. 정사(政事)가 젊음의 마음대로 휘젓는 정사는 반드시 화를 부른다 하였고 화가 화를 부르는 정사는 고른 정사가 아니라고 그는 평상시의 철학을 말하기도 했었다.

1571년 그는 늙은 몸을 이끌고 조정에 나와서 그동안 몸 담아온 궁중을 뒤돌아보며 영의정 자리에서 물러난다. 그리고 선조(宣祖)로부터 궤장을 받으며 조광조(趙光祖)의 참회를 설원하고 정몽주(鄭夢周)의 후손을 기용하고 이기(李기) 정언각의 관작을 추탈하고 재해때는 세공을 덜고 옥송을 공정히 다스리고 정공도감(正供都監)을 두어 대납의 농간을 없애는 것등을 부탁하여 선조(宣祖)가 모두 실시 하였다.

그는 죽을 때 앞으로 당파싸움이 있을것이라하여 붕당을 예언하는 글을 올려 그 당시는 삼사 규탄을 받았으나 뒤에 동서분당이 일어나선 그의 예언을 높이 평가하며 위대한 정치가였음을 모두가 알고 높이 평가하였다.

일을 서두르지않고 차분하게 국사일에는 정정당당하게 어떤 일을 처리해도 구김살없이 처리하던 이준경(李浚慶)은 이조중엽의 명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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