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열사 김복한 |
---|---|
구분 | 역사인물 |
내용 | 독립(獨立)을 위해 의병(義兵)을 일으켰던 열사(烈士) 김복한(金福漢) 서기 1963년 대한민국건국공로훈장 단장(大韓民國建國功勞勳章 單章)에 빛나는 김복한(金福漢)은 이조말엽부터 일본제국주의(日本帝國主義)의 압정하에서도 고고하게 조국의 독립을위해 헌신 노력하다가 아까웁게도 목숨을 바친 거룩한 독립투사다. 우리나라를 식민지화해버린 왜인들이 그로 하여금 벼슬을 주며 주구노릇할 것을 권유 하였으나 끝내 뿌리치며 때로는 빈한(貧寒)과 싸우기도 하고 굶주린 백성들과 함께 산간 벽지에서 은거하기도 하면서 오직 하나 조국의 산천과 하늘을 함께하며 고고하게 일생을 바치니 그의 넋은 참으로 우리고장 백성들게 나라는 우리가 아껴야 한다는 이념으로 승화시켰던 애국자다. 그는 안동김씨(安東金氏) 문충공(文忠公) 김상용(金尙容)의 12세손으로 철종(哲宗) 11년(1861)에 홍성(洪城)땅 소향리(昭香里)에서 태어 났으며 자(字)는 원오(元五)이고 호(號)는 지산(志山)이다. 어렸을때부터 천성이 강직하고 꾸밈이 없이 성실해서 마을 아이들도 그를 따르는 사람이 많았으나 항시 아이들과 어울릴때는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예의범절(禮儀凡節)이나 사람이 살아가는데 여러 가지 고충이 있기 마련이며 이 고비를 잘 넘기는데 사람은 보람이 있다는 어른스러운 말을해서 마을 사람을 놀라게 하였었다. 그는 자라면서 그때부터는 글을 읽기에 전념을 하게된다. 나라안이 차츰 개화(開化)의 물결을 타고 시끄러워지자 그는 우리나라가 자리할 수 있는 관점도 모색하였다. 그래서 성리학(性理學)에 기본을둔 나라안의 정신문명(精神文明)이 시대적(時代的)으로 변천하는데 이렇게 변천하여야 하며 새로운 문화의 소화에도 역점을 두고 공부를 했었다. 그가 여섯 살때 상을 당하고 일곱 살때 상을 당하며 또한 그후에도 여러모로 어려운 고비를 넘길 때 변천에 따르지 않은 봉건성은 차츰 개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는 33세 되던해에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길에 오른다. 교리(校理) 대사성(大司成)등을 거쳐 승지(承旨)에 이르렀을때는 조정에서 새롭게 밀려오는 새물결에 우왕좌왕하는 대관들을 보고 그는 개탄을 하였으며 임금님께 때때로 진언을해서 많은 사랑을 받기도 했었다. 1895년 명성황후(明星皇后) 민씨(閔氏)가 살해(殺害)되자 그는 분노를 참을수없어 벼슬을 버리고 낙향(落鄕)했으며 이해 단발령이 내리자 안병찬(安炳瓚)등과 함께 의병(義兵)을 일으켜 홍주성(洪州城)에 웅거하여 싸우다가 홍주목사(洪州牧使) 이승우(李勝宇)의 배신으로 검거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獄苦)를 치르다가 다음해 특사로 풀려 나왔었다. 그 후(後) 옥에서 풀려나오자 그에게는 대사성(大司成)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의 벼슬이 내려졌으나 끝내 사양하고 1905년 을사조악(乙巳條約)이 굴욕적으로 체결되자 매국노(賣國奴) 오적신(五賊臣)을 사형시킬 것을 상소하였다가 다시 검거되고 석방된후는 의병을 일으키는 민종식(閔宗植)과함께 다시 홍주성(洪州城)에서 싸우다가 검거되어 서울로 압송돼서는 가진 고문에도 굽히지 않고 우리나라의 독립만이 오직나의 소원이라고 끝까지 반항을 하다가 형무소에 갇히고 옥살이를 하였었다. 그는 옥중에서 생각하기를 정사(政事)를 하는 중신들이 조금만 나라를 아끼는 일에 몰두하였다면 이런일이 없을거라고 개탄하였었다. 그는 다시 옥에서 풀려나와선 서면(西面) 이호리(梨湖里)에 은거하였다가 보령시(保寧郡) 청라면(靑羅面) 옥계리(玉溪里)에 은거를 하였었다. 이젠 일본제국주의의 치하가 되어서 많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들앞에서 주구노릇을 하는 것을 보고 세상에 이렇게 세월이 흘러야 하는거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미여지는 것 같았다. 아무리 목에 풀칠할 방법이 없다 하더라도 나라를 짓밟은 왜구의 앞잡이로 교만을 부리는 우리나라 친일파(親日派) 무리들의 신세가 한스럽기만 했다. 그는 청라면(靑羅面)산중에 은거하면서 빈한(貧寒)과 부딪치게 된다. 유림(儒林)들이 찾아와선 그의 손목을 붙잡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많았었다. 있으면 먹고 남으면 이웃사람들에게 나누워주고 없으면 굶는 그는 그래도 죽는 것은 두렵지 않았고 언제쯤 이 나라에 독립이 오느냐 하는 것을 기다릴뿐이었다. 그래서 1919년엔 유림대표(儒林代表)로 곽종석(郭鍾錫)과 함께 파리(巴里) 강화회의(講和會議)에 독립청원서(獨立請願書)를 냈다가 다시 왜구에게 피검되어 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어둠침침한 감방이었지만 그의 눈앞엔 독립될 우리나라가 보였었다. 누가 뭐라고 한들 이 나라의 백성임을 자랑하는 그는 마침내 1924년 3월 29일에 64세로 눈을 감으니 우리나라 백성치고는 애석해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의 영구를 모신 산수동(山水洞) 일대는 조객들로 대혼잡을 이루웠다. 끝내 조국독립을 보지 못한채 눈을감은 그의 영구가 실려나갈 때 수천명이 모인 산수동(山水洞)에서는 울음바다였고 나라를 위해 끝내 목숨으로 지킨 우리나라의 앞날을 걱정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한나라의 운명은 그나라 백성의 힘에서 흥망이 좌우된다는 그의 좌우명은 지금도 역력히 살아있다. <보령 5열사의 한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