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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령의 문화

보령의 문화 글의 상세내용
제목 공신 이시방
구분 역사인물
내용 이조(李朝) 인조반정(仁祖反正)의 공신(功臣) 이시방(李時昉)

이조(李朝) 인조(仁祖)때 공신 이시방(李時昉)의 신도비(神道碑)가 보령시(保寧郡) 오천면(鰲川面) 영보리(永保里)에 있다.

그는 선조(宣祖) 27년(1594)에 태어나서 아버지 이귀(李貴) 형 이시백(李時白)과 함께 인조반정(仁祖反正)에 공을 세워 세부자가함께 공신으로 인조시대의 초석(礎石)이었던 사람이다.

자는 계명(季明)이고 호는 서봉(西峰)이며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본관은 연안(延安)으로서 이귀(李貴)의 차남으로 태어나서 인조반정(仁祖反正)때 이등공신이 된다. 아버지 이귀(李貴)는 일등공신이 되는데 그는 원래가 강직하고 용맹성이 있었으며 불의엔 참지 못했었다.

광해군(光海君)의 오랫동안의 실정에 항시 불만이 많아 그 주위에 벼슬에 억매어 감투병에 걸려있는 무리들을 조소하였으며 때로는 백성들이 등을 돌린 대감이 어느때에 써먹는 대감이냐고 공박하기도 했었다. 조정에 있는 문신 무신들도 그를 따르는 자가 많았으며 광해군(光海君)이 그를 호되게 벌을 줄려하였으나 조정에서 그를 따르는 중신들이 그를 옹호하여 벌을 면한 일도 있었다.

인조반정(仁祖反正)후엔 항시 인조(仁祖)의 측근에서 자리한다. 형 이시백(李時白)은 풍채가 당다하고 힘이 셌으며 지혜가 있으면서 겸손하여 무능한 사람같이 보였으나 우국지성에 넘친데 반하여 그는 솔직하고 일을 밀고 끌고나가는 힘이 있는 사람이란 평으로 보아 솔직하고 용감한 인물이었음을 알수가 있다.
다음해 이괄(李适)의 난을 일으키자 군사를 모아 반란군을 토벌하고 인조(仁祖) 3년(1625)엔 서산군수(瑞山郡守)가 되었다. 인조(仁祖) 5년(1627)엔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자 순검사가 되어 시급 불려가서 강화(江華)에 군비를 정리하는등 군량미 조달에도 힘써 다음엔 가선대부가 되고 이해에 그의 공을 높이사서 광주목사겸 남한산성방어사가 되었다.

1623년엔 한성부(漢城府) 좌우(左右)를 역임하고 인목대비(仁穆大妃)가 죽자 국장도감과 산릉도감의 제조가 되기도 했었다. 1636년엔 나주목사 전라도 관찰사를 지내다가 병자호란 때는 실책이 있어서 충청도(忠淸道) 정산(定山)으로 귀양을 갔었다.
이조반정(仁祖反正)이후 부상하게 정사일에 뛰었던 그가 칠갑산(七甲山) 아래 산골 두메에서의 유배생활 4년간에 그는 옛날처럼 백성들과 거듭 어울리면서 민심의 방향을 알게된다. 인조(仁祖)의 선정은 백성들로부터 호감을 샀으며 불행한 외침으로 나라가 가끔 어수선하기는 하나 주권있는 행사엔 백성들이 궁중을 믿을수 있게 되었다는 공론에 그는 수긍을 하나 나라안이 안정되었을때는 중신들이 더욱 백성의 편에들어서 정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난시보다 더욱 중신들 중점으로 정사를 해서 오히려 평상시엔 더욱 백성들이 괴롭다는 공론에 그는 느끼는 것이 많았다 한다.

촌부들과 산에가서 산과일을 따먹으면서 가뭄에 농촌의 초근목피의 쓴맛을 상상하였고 베를 짜는 노모를 보고 옷 한벌의 귀중한 풍경도 맛보았다. 그는 솔직하고 담백해서 눈으로 보는 것을 바로 소화시키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 백성의 괴로움을 4년간 맛보다가 조정의 부름을 받고 그이 죄가 용서됨과 동시에 인조(仁祖) 18년(1640)에 제주도목사(濟州道牧使)가 되어 제주도로 부임했다.

그때 제주도엔 그가 인조반정(仁祖反正)때 몰아낸 광해군(光海君)이 안치되어 있었다. 그는 제주도목사로서 선정을 베푸니 백성들이 많이 따랐다. 그는 항상 동헌을 나와서 농민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하였고 백성들이 원하는 민성을 잘 소화하였다. 1641년 인조(仁祖 19년)에 광해군(光海君)이 죽었다. 광해군(光海君)이 죽으면서 제주도 일대는 해로가 험난하여 조정에 알리지도 못하고 그가 여러 관리들과 습렴을 하였다. 그가 몰아낸 왕이었지만 선왕(先王)으로서의 광해군을 정성껏 모시니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눈시울을 뜨겁게 하였다 한다.

그는 다시 육지로 올라와선 광주수어사(廣州守禦使) 병조참판(兵曹參判)을 지내고 호조참판(戶曹參判)으로 있을 때 대동법(大同法)의 시행을 주장하였으나 뜻은 이루지 못했다.

효종(孝宗)때 형조(刑曹) 호조(戶曹) 공조(工曹)판서를 지내며 40여년을 3조에 역사하는 동안 전심전력 충직하게 정사를 보살폈으므로 그가 죽은날 윗사람이나 아랫사람 모두 애석해 했다 한다.

세상에 태어나서 무엇을 배우면서 살다가 배우면서 일생을 마치는 인생이 가장 값진 인생이라고 말한 그는 멋있게 살다 간 중신이다.
鰲川面 永保里에 墓와 神道碑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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