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청산리의 별 김좌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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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 | 역사인물 |
내용 | 우리나라의 별, 청산리(靑山裏)의 별 김좌진(金佐鎭) 청소면(靑所面) 재정리(才井里) 산(山) 49 늑적골에 독립투사 김좌진(金佐鎭)장군의 묘가 있다. 그는 고종(高宗) 26년(1889)에 충청남도(忠淸南道) 홍성군(洪城郡) 갈산면(葛山面) 상촌리(上村里)에서 김형균(金衡均)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충남(忠南) 보령시(保寧郡) 청소면(靑所面) 죽림리에서 거주 했었다. 왜적이 물러가자 그는 선전관이 되었었고 전운을 잊은듯 잠시 집에 와있을 때 이번에는 북쪽에서 청(靑)나라 군사가 쳐들어 왔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그는 그 소식을 듣자 그길로 한양(漢陽)으로 올라갔다. 벌써 청나라 군사들이 압록강을 넘어서 한양(漢陽)으로 진격중이어서 그는 군사를 모으라고 하였으나 한양의 인심이 소란하여 군사를 모을 수가 없어서 그 길로 전라병영으로 말을타고 내려갔다. 그래서 전라병사 김준용과 함께 군사를 이끌고 한양으로 오게 되었다. 그가 군사를 이끌고 한양에 들어서려할 때 벌써 청의 군사가 한양을 점령한 후였다. 호는 백야(白冶)이고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부유한 명문에서 태어난 그는 세 살때 부친이 별세하자 한참동안 외로움속에 묻혀 있었으나 7, 8세때부터 하인들과 병정놀이를 하며 글을 읽었었다. 천성이 부하를 거느릴 사람이라고 마을 사람들이 그를 평가하였었다. 15세때엔 자기집 전답을 가꾸는 50여호의 노복들을 불러다가 종문서를 태우며 2천여되는 전답을 무상으로 배분하여주며 앞으로 먹고 사는 것보다 나라를 걱정하는 사람이 되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16세때에는 호명학교(湖明學校)를 설립하였으며 17, 18세때는 손오병서(孫吳兵書)를 읽으며 만일에 대비했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상경하여 한국무관학교를 졸업하고 오성학교(五星學校)의 교감으로 있었으며 노백림·윤치성과 깊이 사귀고 그후 박상진(朴尙鎭)의 광복단사건(光復團事件)으로 삼년간 옥살이를 하다가 출옥하자 「男兒失手難容地 志士倫生更待時」라고 굳게 결심하고 간도(間島)로 건너가서 삼일운동(三一運動)직후 길림성(吉林省)에서 서일(徐一) 나중소(羅中昭) 이동령(李東寧)과 함께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를 조직하여 총사령관이 되었다. 그는 독립운동에는 유능한 사관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士官練成所를 설치하고 무관양성에 힘썼으며 1920년엔 나중소(羅中昭) 이범석(李範奭)장군과 함께 청산리 싸움에서 크게 왜군을 무찔렀다. 우리독립군은 이청천(李靑天)장군이 영도하는 서로군정서와 북로군정서가 있었는데 김좌진(金佐鎭)장군이 이끄는 북로군정서는 장백산맥에 들어가서 좀더 군사훈련과 병력을 보강해서 왜적을 무찔러야겠다고 장백산맥으로 이동하던중 길림성(吉林省) 용현(龍縣)<청산리(靑山裏)를 삼도구>라고 부른다. 이 곳에 이르렀을 때 왜적의 대군을 만나 청산리(靑山裏)싸움이 시작되었다. 우리군사들은 먼저 편의대에게 정찰을 시키고 적의 병력을 정확히 안다음 또한 적이 머무르고있는 부근의 한교(韓僑)로 하여금 우리군사의 병력이 미약하다는 것을 알리게 하여 우리군을 경시하게하고 우리군사를 이중대(二中隊)로 나누어 일중대(一中隊)는 김좌진(金佐鎭)장군이 이중대는 이범석(李範奭)장군이 지휘하고 백운평 전방 나무숲에 매복하였다가 일제히 공격하니 적은 당황한 나머지 많은 전사자를 내고 도망해 갔다. 다음은 군대를 잽싸게 움직여서 밤새 행군하여 160리나 떨어진 갑산촌(甲山村)에 도착하였을 때는 새벽 두시 40분이었다. 설마 우리군사가 이렇게 재빠르게 이동할줄을 모르는 왜군들은 어제 싸웠던 장소에만 증병하는데 급급하였다. 김좌진(金佐鎭)은 천수평(泉水坪)에 주둔하고 있는 적 기병대(騎兵隊)를 새벽 다섯시를 기해서 공격하니 적은 4명이 남아서 도망쳤을뿐 전멸하였었다. 김좌진(金佐鎭)의 전법은 참으로 통쾌할만큼 지략적이었다. 허나 싸움은 이제부터였다. 적은 후방이 교란됨에따라 정신없이 전렬을 가다듬더니 공격해 오기 시작했다. 허나 그때는 벌써 우리독립군이 그 장소를 떠난후였다. 독립군은 또 강행군을 해서 어량촌(漁良村) 전방 마록구(馬鹿溝)로 달려갔다. 그리고 여기 숲에 숨어서 적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적은 어제싸운 삼도구(三道溝)쪽으로 2만의 군사를 이동시키며 이곳을 지나가고 있었다. 적이 이 도구앞에 나타났을 때 김좌진(金佐鎭)장군이 크게 깃발을 휘둘렀다. 드디어 2만과 우리군사 2천의 싸움은 시작되었다. 우리군사들은 유리한 위치에서 적을 무찌르니 많은 군사인 적도 어쩔수없이 쓰러져갈 뿐이었다. 싸움은 치열해서 김좌진(金佐鎭)의 모자가 날라갔고 이범석의 군도가 두동강이로 짤라졌다. 허나 전승은 병법에 뛰어난 김좌진(金佐鎭)장군이 지휘하는 독립군에게 돌아왔다. 적은 한 연대장을 잃었고 사상자가 3,300명이라고 그들이 발표한 것으로 보아 큰 타 격이었을 것이다. 그후에도 그는 독립을 얻기위해 독립군 양성에 힘썼고1929년엔 한국연합회를 결성하여 항일투쟁과 동포의 단결에 힘쓰다가 1930년 고려공산청년회 자객 김일욱(金一昱)에의해 암살되었다. 이국천리에서 오직 독립을 위해서 싸운 우리의 애국자이며 독립투사가 결국은 동포인 공산당원에게 암살되었던 것이다. 「김좌진(金佐鎭)은 위대한 장군이다」라고 말한 것은 그에게 패한 적장 장군도 실토한 솔직한 고백이었다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