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성리학자 서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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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 | 역사인물 |
내용 | 우리나라 서민(庶民)의 성리학자(性理學者) 서기(徐起) 서기(徐起)는 보령시(保寧郡) 남포면(藍浦面) 제석리(帝釋里)에서 태어났다. 그는 자를 대가(待可)라 하였고 호는 고청(孤靑)이라 부르며 대학자가 되었으나 어렸을때의 남의집 몸종이었다. 그의 조상은 고려(高麗)때의 명신 서필(徐弼)∙서희 (徐熙) 서눌(徐訥)로 이어지는 세도가의 집안이었으나 고려가 멸망하자 이조 때부턴 평민이되고 더구나 그의 조부때부터 가난한 탓으로 남의집으로 팔려온 종의 신세가 되어버렸던 것이다. 그는 어렸을 때 한양(漢陽)에서는 심충겸(沈忠謙)의 몸종이었다. 장안에서도 세도가인 심충겸(沈忠謙)의 몸종으로 들어온 그는 어렸을때부터 재기가 있어서 주인으로부터 귀여움을 받았었다. 그에게 잔심 주름을 시키면서도 그의 제기에 놀래어 주인은 가끔 그에게 이상한 질문을 던지곤 하였지만 그는 있어 앞으로 큰 인물이될 것을 알았으므로 그가 자라자 후한 노자를 주어서 남쪽으로 내려 보냈다. 그래서 장안의 세도가 집에서 자란 그의 이름을 서기(徐起)라 하고 우선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는 고향에 들러서 어렴풋이 기억에 남는 집으로 찾아갔다. 깁은 오두막집이었으나 그것마저 허물어져 있었다. 그는 가족을 찾고싶어서 자기는 이 집에 살던 누구라고 말하며 가족의 안부를 물었으나「종놈의 새끼가 집안소식은 알아 뭐해!」하고 대꾸도 안해준다. 그는 고향에 내려가서도 자족하나 못 찾고 떠나게 된다. 조으이 신분이 이렇게 더러운 신분인가 하고 개탄하면서 그는 고향을 떠났으나 갈곳이 없었다. 그래서 우선 찾은 것이 절이었다. 그는 종으로 있을 때 어깨너머로 성리학(性理學)을 익혔었다. 그러다가 절에 들어와선 한 노승(老僧)밑에서 선학(禪學)을 익히게 되었다. 그가 어렸을 때 생각한 것처럼 살아생전 사람을 다스리는 사람이 되지않고 사람에게 깨우치는 사람이 되겠다는 것이 꿈이었으므로 선학(禪學)에 몰두하다가 하루는 우연한 기회에 이 곳에 들리게된 토정(土亭) 이지함(李之함)을 뵙고 그의 잡학과 술수에 감명을 받고선 그를 따라가는 것이다. 한사람은 한산이씨(韓山李氏)로 명문의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정치가 싫고 벼슬이 싫어서 떠돌아 다니는 토정(土亭)이었고 한사람은 같은 고을 출신이면서 천한 종으로부터 출발하였지만 재주가 있는 서기(徐起)로 그들은 서로가 의사가 통해지는듯 전국을 방랑하다가 그들은 탐라 제주도로 들어갔다. 제주도로 조각배를 타고가다가 풍랑을 만나도 토정(土亭)이 주문을 외우면 파도가 가라앉곤 했다. 그래서 서기(徐起)는 이토정(李土亭)에게 그비결을 가르쳐 달라고 하였으나 토정(土亭)은 그에게 잡학(雜學)이나 술수(術數)를 가르쳐 주지않고 그에겐 유명한 선생을 소개해 준다. 서기(徐起)는 토정(土亭)과 떨어져서 토정(土亭)이 소개한 이소재(李素齋)와 이중호(李仲號)의 문중에 들어가 3년동안 글을 배우게 되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성리학(性理學)의 문중에서 자랐기에 그의 학문은 날이 갈수록 빛을 내기 시작했다. 그는 3년동안 학문을 배워 사람들을 가르칠수 있는 자리에 서게됨을 이소재(李素齋)가 인정하며 그만 어데가서 후인들에게 글을 가르치라 하므로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는 고향에 돌아와서 서당을 내며 송(宋)나라의 여대림(呂大臨)의 향약(鄕約)을 실시해 보고자하고 서생들도 모았었다. 여대림(呂大臨)이란 일종의 도덕적인 율로서덕업상권(德業相勸) : 덕을 권하는 것. 과실상규(過失相規) : 잘못을 고치는 것. 예속상교(禮俗相交) : 예를 지키도록 하는 것. 환난상휼(患難相恤) : 서로 물질적인 원조. 네가 조목을 지키게하는 학문의 길이었다. 그는 열심히 사람들에게 학문의 기로유도하며 강론을 폈고 강신소(講信所)까지 내서 아이들으 가르쳤다. 처음에는 그의 학문을 높이사는 듯 많은 호응이 있었으나 날이 갈수록 서생들의 출입이 줄어들었으며 그를 가르켜 독선생이라고 냉대하며 서생이 없어지고 하루저녘엔 서생들이 강신소(講信所)마져 태워버렸다. 학문의 길에서 아이들에게 가르침을 주려는 그의 시도는 이렇게 해서부터 실패하자 그는 눈물을 머금고 고향을 떠나 전에 가본일이 있는 지리산(智異山)속 홍운동(紅雲洞)으로 들어갔다. 그는 사람을 가르치는데도 신분이 따라야 한다는데 환멸을 느낀듯 깊은 산속 물이 맑게 흐르는 계곡에 사막을 짓고 봄에는 밭에나가 씨를 뿌리고 가을에는 곡식을 걷어들이며 자연의 혜택으로 먹고 살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가 힘껏 일하였으나 일년간 먹을 양식이 안되자 할수 없이 산속에 들어가 산 과일을 따먹으며 굶주림을 면하며 살았다. 그는 고생하면서도 사람답게 자연과 벗하며 사는 것으로 만족하였었다. 그러나 어떻게 그가 여기에 와 있는 것을 알았는지 글을 가르쳐 달라는 서생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글을 가르쳐 달라는 서생들에게 그는 말하기를 세상을 등진 사람에게 뭘 배우겠냐고 말하며 배울 것도 없고 가르칠 것도 없다고 사양했다. 그러나 민속과 실용적 학문에 밝은 그의 소문에 서생들은 물러가질 않았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몇사람을 가르쳤으나 여전히 식량난이었다. 하루는 먹을 것이 없어서 서생들과 산으로 과일을 따러 갔다가 이웃에있는 절의 중들과 큰 싸움이 벌어졌다. 굶주림에 시달리는 중들이 혈안이되어 덤벼드는 것을 보고 그가 인간의 절망을 느낀것도 사실이었다. 그는 그 싸움이 있은후 홀연히 지리산(智異山)을 버리고 계룡산(鷄龍山)을 찾아 공암(孔岩)에 와서 초가집을 지었다. 그가 공암에 정착하자 서생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어느덧 서기(徐起)의 나이도 오십이 넘었다. 그동안 산 경험을 통해서 얻은 그의 학문은 한자한자가 서생들에게 어필되었을 것은 물론이다. 「사람을 차별하지 말아라. 위대한 학문의 길은 넓고 깊은 것이다. 누구나 학문의 길엔 자유롭게 들어갈 수가 있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가 학문의 길에 들어섬은 자유이니라. 천품은 억압하지 못할것이다.」그는 이렇게 말하며 서생은 글을 깨우칠 것을 원했다. 어느덧 오십이 넘어서 머리는 반백이었지만 옛날의 고생을 잊은 듯 학문에 정성을 다 하는 것 을보고 누구나 머리를 수그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어지러운 세상에 태어나자 자기의 장한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은 후회하였으나 임금님이 여러번 바뀌어 조정의 세력판도가 이리저리 바뀌어도 그런 것은 잊은 듯 그의 서원에선 책읽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다. 그의 제자들로서 출세한 인재들도 많았다. 그러나 제자들이 이름을 밝히지 않는 것은 아이러니컬한 이야기다. 고향이 충청남도 남포면 재석리 그러나 그는 고향을 버린채 공주 공암에 자리해서 가 르치고 묻힌 곳이며 지금도 여기 충천서원에 모셔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