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선비 황윤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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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 | 역사인물 |
내용 | 나라를 지키기위해 국방(國防)의 필요성을 외친 선비 황윤길(黃允吉) 우리나라와 이웃한 나라 예의 바른나라 그리고 학문에 깊이가 있는 나라의 사신 황윤길(黃允吉)대감입니다.」 일본에서 우리나라에 왔던 사신(使臣) 겐소(玄蘇 )가 자기나라 영주께 이렇게 소개하자 영주는 거만스럽게 황윤길(黃允吉)을 한참 쳐다보더니 「그대의 나라에선 명(明)나라의 속국으로 명(明)나라를 섬기는데 명(明 )나라의 속국인가?」하고 다시 한번 그를 노려본다. 황윤길(黃允吉)은 조용히 고쳐앉으면서 이렇게 대답 했다. 「우리나라는 작은나라 이지만 명(明)나라와는 친한 우방으로 서로 협조하고 사는곳이지 속국운운 함은 천부당 만부당하오」하고 조용히 영주를 나무랬다. 섬나라인 왜국이 여러갈래로 찢어져서 서로 다투고 싸우다가 무력으로 통일을 본 영주는 기고만장했다. 황윤길(黃允吉)은 생각하기를 이들이 싸워서 얻은 힘을 과시하기 위해 틀림없이 밖으로 무력침략같은 것이 있으리라고 예감했다. 그들 사는 나라에선 군졸들이 칼을 쓰는 훈련을 했고 하루종일 군사훈련을 하는 것을 보고 이들이 틀림없이 어떤큰일을 저지를 것이라고 생각하곤 돌아올 때 대마도(對馬島)에 들려 도주(島主) 종의지(宗義智)로부터 조총 두자루를 선물받아가지고 왔다. 싸움도 옛날식으로 돌을 굴리고 화살을 날리고 칼로 맞부치는 싸움보다 이제부터는 총으로 쏘는 싸움이 될것이라고 왜나라는 총으로 무장한 군사들이 지금도 군사훙련을 하고 있는데 이것은 틀림없이 우리나라를 침략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고 아뢰었다. 그러나 그와같이 통신부사(通信副使)로 갔던 김성일(金誠一)은 그들은 침략해올 것 같지 않다고 말하여 당시의 세력으로는 김성일(金誠一)편이 강한 편이었으므로 자연 그의 말은 채택되지 않았다. 황윤길(黃允吉)의 자는 길재(吉哉)요 호는 우송당(友松堂)이었다. 본관은 장수(長水)로 조선시대때의 명상 황희(黃喜)의 5대손으로 중종(中宗) 31년(1536)에 태어나서 명종(明宗) 16년(1561)에 문과에 급제하고 벼슬길에 올랐었다. 그는 강직하고 사후판단에 예리해서 일본(日本)을 다녀와서 부터는 더욱 침략이 꼭 있을거라고 그의 소견을 말하여 조중봉(趙重峰)은 황윤길(黃允吉)의 말을 전적으로 신임하여 왕에게도 수차 침략에 대비할 것을 상소하였었다. 조정에서는 왜국의 침략이 있을 것을 부인하면서 새로운 무기인 조총(鳥銃)도 실용할 가치도 갖기전에 오랑캐들이 침범해오자 그때부터 당황하며 싸움을 시작하였으나 역부족이었다. 나라를 아끼고 나라를 사랑하는 무명의 군사들은 조총앞에 수없이 쓰러져갔다. 나라를 아낀다 하면서도 그 권력이 무엇이든지 자기들의 권력싸움에 하루 하루를 보내던 대감들도 죽기 싫어서 봇짐을 싸아야했고 그들만 믿었던 백성들은 파리목숨처럼 죽어갔다. 의병들은 여기 저기서 일어나서 싸웠으나 최신무기로 무장한 오랑캐들 앞에선 몇배의 희생이 따랐다. 우리나라 국토가 오랑캐의 발굽에 짓밟힌 다음에서야 황윤길(黃允吉)의 말이 옳았다고 통분했으나 그때는 이미 홍수가 터진 후였다. 선조(宣祖)는 의주(義州)로 피난가서 답답한 중신들 틈에 끼여 그래도 나라를 구해야겠다고 독전을 하였으나 큰 성과를 얻은 무신은 이순신(李舜臣)과 권율(權慄)같은 장수와 의병장들이었다. 왜적을 무찌르기위해 주야로 싸우는 이순신(李舜臣)장군을 중신들이 파직시키는 사태까지 전쟁중에 있었으니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이 중신들이었다. 한나라가 위급할 때 당쟁(黨爭)도 없는 나라가 이상적인 나라라고 말한다. 끄떡하면 외세에 의존하고 권력에 어두운 정치가 되풀이된다면 나라를 보는 시야도 좁아진다 한다. 황윤길(黃允吉)은 그래서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오르나 그는 당파 싸움에 편승하기 싫어했고 나라의 위급함을 근심하며 임진왜란이 터진후는 적을 무찌르는 일에 열심이었다. 자기의 공로를 자랑하지않고 한 나라의 벼슬살이하는 선비로서 오직 나라만을 사랑하고 생각하다가 그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힘이 있는 자만의 나라가 아니고 나라는 백성이 주인이라는 귀감을 보여준 선비가 황윤길(黃允吉)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