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학자 서거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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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 | 역사인물 |
내용 | 性理學(성리학)에 바탕을둔 박학의 學者(학자) 서거정 세종대왕(世宗大王)때부터 6대 임금님을 모시며 벼슬길에 오르는 선비들의 등용문이었던 과거시의 시험관을 23번이나 치른 서거정(徐居正)도 충남(忠南) 보령시(保寧郡) 남포면(藍浦面)에서 살았다. 그는 학문의 대가로서 서일학(性理學)을 비롯하여 천문 지리 의학에도 밝아서 세조(世祖)때는 동국통감(東國通鑑)을 또한 경국대전(經國大典)을 편찬하였으며 성종(成宗)때는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을 편찬하기도 했었다. 그의 자(字)는 강중이고 호는 사가정(四佳亭) 그리고 시호는 문충이다. 본관은 대구(大邱)로 목사를 지낸 서미성(徐彌性)의 아들이고본관은 대구(大邱) 양촌(陽村) 권근(權近)의 외손이었다. 세종(世宗) 2년(1420)에 태어난 그는 여섯살때 글을 읽고 시를 써서 신동이라고 불렀었다. 글을 읽으면 뜻의 풀이를 잘하였고 시를 지으면 여러사람의 감명을 받으니 서거정(徐居正)의 이름은 어려서부터 널리 알려졌다. 세종(世宗) 26년(1444)에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고 사재감직장(司宰監直長)이되었다. 세조 2년(1456)엔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재했으며 다음엔 문신정시(文臣廷試)에 장원하는등 네 번이나 과거에 급제하여 육조의 판서를 두루지내기도 하며 대사헌(大司憲)을 두 번 지내며 조정에서만 45년 지낸 학자였다. 그는 세종(世宗)때부터 학문이 널리 알려졌고 단종(端宗)때는 많은 학자들이 조정을 떠났으나 세조(世祖)의 처형을 묘하게 피한 신숙주와 쌍벽을 나누는 선비였다. 그래서 학문이 현실참여에서 선비형을 놓고 많은 오해도 받았으나 그는 말하기를 학문을 베풀고 자기것으로 섬기는 것이지 학문을 이유로 벼슬을 할 생각은 없다고 묘한 대답으로 응수하였었다. 허나 그도 세종(世宗)이후에 많은 선비들이 별이 떨어지듯이 사라져갈 때 그는 고통이 심했었다. 자기가 교자를 타고 조정에 드나들때 세조(世祖)로부터 버림받은 선비나 그 후예들을 보면 그들을 붙잡고 눈물을 흘렸고 그들을 도우려 했었다. 특히 생육신의 한사람인 김시습(金時習)은 그가 좋아하고 아끼는 인물이었으므로 그가 거지꼴이 되어 한양에 머무르면 위험을 무릅쓰고 그를 찾아가선 자기의 심정을 달랬으며, 또한 그 많은 눈초리도 아랑곳없이 김시습(金時習)을 조정에서 중용해야 한다고 역설하기도 했었다. 세상에서 학자로서의 가장 높은 희망이 있다면 자기의 학문을 널리 마음속에 익히는 것이라고 말한 말한 그가 김시습(金時習)을 아낀 것도 김시습의 풍부한 지식과 선비로서의 길을 끝내 걷는 그의 태도였다고 한다. 선비들의 등용문 인 과거시험때도 그는 엄격했다. 글을팔아서 벼슬길에 오를려는 선비는 있을수 없음을 누차 강조하면서 과거에 급제한 유능한 인제들을 불러서 학문의 길과 벼슬길의 갈림길을 잘 말해주곤 했었다. 우리나라에서 불교가 한참 쇄퇴기를 맞이한 것은 세조(世祖)이후라고 말한다. 불교(佛敎)가 국교처럼 행세되던 고려(高麗)때의 선악을 누구보다도 잘아는 서거정(徐居正)은 불교(佛敎)로 뿌리한 자리를 성리학(性理學)이 뿌리내리는데 공헌하기도 했다. 신숙주(申叔舟)가 김시습(金時習)과 사귀기를 갈먕하여 김시습(金時習)을 술에 취하게 하고 집에 모셔와선 그와의 우정을 나누려 하였으나 김시습(金時習)이 술에서 깨어난 다음 신숙주(申叔舟)가 붙잡는 옷이 찢어져도 옷이 찢긴채 대문을 차고 나가 대신에 서거정(徐居正)과는 대화를 나누고 정을 나눈 것으로 보아 서거정(徐居正)의 성리학(性理學)만은 인정하였다는 것이다. 외로운 고비에서 6대 임금을 모시면서 45년간이나 조정에 머물러서 정치바람 하나 타지않고 고고하게 산 판서로서 인화가 좋았으며 학문이 그의 벼슬보다 앞서기로 유지되었다고 풀이하기도한다. 글을 짓고 글을 잘써서 창경신궁이 완성되자 전당 정각문의 액호도 모두 그가 명명하고 그가 글을 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