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예학자 이지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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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 | 역사인물 |
내용 | 예학자(禮學者)로서 풍류(風流)에 산 선비 이지함(李之菡) 대천해수욕장(大川海水浴場)에서 서쪽으로 은포리(隱浦里) 송학(松鶴)을 지나 포구로 향해 12km쯤 가다보면 보령시(保寧郡) 주포면(周浦面) 고정리(高亭里)가 나오고 동구 입구까지 바닷물이 들어오는 포구 언덕바지에 토정의 아버지 신도비(神道碑)가 있고 오른쪽에 그 2배나 되는 신도비가 서있는데 이 비가 이지함(李之함)의 신도비(神道碑)다. 비석은 1965년에 세운 것으로 되어있는데 없어졌던 신도비를 이곳에 다시 세운 것이다. 이 곳에서 언덕을 넘으면 이어있는 산허리에 묘가 즐비하게 자리해 있는데 윗쪽 중앙에 토정(土亭) 이지함(李之함)의 아버지 묘가 있고 그 왼쪽에 묘가 있으며 그 위에 비석조차 없는 요절한 그 아들들의 묘가 있다. 묘비가 남아있는「贈領議政」의 묘만도 넷이나 된다. 조카 이산보(李山甫)의 묘도 여기에 있으며 맨 아래쪽에 의정부좌참찬(議政府左參贊)을 지낸 한평군(韓平君) 이공(泥工)의 묘가 있다. 이 묘는 토정(土亭) 이지함이 손수 잡았다는 묘인데 서해(西海)바다가 내려다 보이고 해송으로 둘러쌓였으며 포구로 들어오는 물이 마치 호수(湖水)같으며 포구앞에 서너개의 암초가 솟아나 있고 멀리 큰섬이 있어서 그림처럼 아름다운 터다. 주역(周易)에 밝은 이지함이 택한 명당터라 한다. 토정(土亭) 이지함(李之함)은 이조때 중종(中宗) 12년에 태어났고 그의 자는 향중(響仲)이며 호는 토정(土亭)이고 시호는 문강(文康)이며 본관은 한산이다. 고려(高麗)때의 목은 이색(三隱 李穡)의 후손으로서 현령(縣令) 이치의 아들로서 어렸을 때 아버지를 잃고 형 이지번에게 글을 배웠고 그 후는 화담 서경덕(花譚 徐敬德)에게 배웠다. 토정집유사(土亭集遺事)를 보면 그를 가르켜 「키는 크고 건강하였으며 얼굴은 검으면서 둥글고 살집이 좋았으며 발은 커서 한자가 되었으며 눈은 빛나서 사람을 움직이게 하였으며 목소리는 웅장하고 맑되 말수는 적었고 기개가 당당했고 위품이 늠름하였다.」라고 기술되어 있는 것을 보면 익히는 제가잡술(諸家雜術)에 능통했던 능력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성리학자 이이(李珥)와 친하여 이이(李珥)가 성리학(性理學)을 배우려 하였으나 그는 욕심이 많아서 배울 수 없다고 대답한 것도 그는 그대로의 기지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주역(周易)에 대통한 학자로서 청빈함을 자랑으로 삼았고 락도의 길을 택해서 오히려 스스로가 지니고 다니는 양반적인 굴레에서 벗어나 서민의 세계로 파고든 민본사상에 뿌리한 철인이었던 것이다. 의학 복술 천문 지리 음양 술서 같은 기술학에 도통해서 기행 일담 예언 등으로 꽉 메워져 있어서 토정비결같은 풀이를 만들기도 하였지만 경서자전에도 통달한 그가 수학과 이학에도 통달하였으므로 민중의 핵심으로 존재할 우려성 없는 학문을 배격하고 오히려 태연해하는 학자였던 것이다. 그는 主敬窮理를 학문의 연구방법으로 택해서 전국을 답사하지 않는곳이 없을정도로 방랑하며 민본과 풍수를 익혔고 서울 마포(麻浦)의 동막부근 초라한 흙집속에서 솥을 뒤집어쓰고 갓이라 하였고 물욕이 싫어서 토막에 살면서 스스로 토정(土亭)이라고 불렀었다. 그는 네 귀퉁이에 큰 막을 단 작은 배를 타고 제주도(濟州道)를 세 번이나 왕래하였지만 풍랑 한번 겪지 않았었다. 몸소 염전을 경영하고 섬들을 왕래하면서 박을 심고 바가지를 만들어 몇 년내에 곡식 수십만섬을 쌓은 일이 있는데 이것을 그는 모두 나누어 주고 만류를 뿌리치며 다른 곳으로 떠났었다. 그가 방랑으로 전반생애를 보내게된 동기를 조중봉(趙重峰)은 젊어서 친구인 안명세(安名世)의 죽음에서 충격을 받은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만년인 선조 6년(1573)에 선조(宣祖)가 학행이 뛰어난 인물 8명에게 육품 벼슬을 내릴때 일원으로 발탁되어 포천현감(抱川縣監)이되고 다음해 아산현감(牙山縣監)이 되어서는 즉시 관내에 걸인청을 두고 불우한 밑마닥 인생을 도왔었다. 그리고 여기가 마지막으로 숨진 곳이다. 그는 선정을 베풀어 칭찬이 대단하였으나 이질병으로 죽으니 1578년 그가 62세때였다. 지금 그가 선정을 베풀은 아산군 영인면 아산리(牙山郡 靈仁面 牙山里)에는 그의 선정비만 남아있다. 누구에게 돋보이게 부귀영화를 누리기도 싫어서 그 많은 재주로 오직 민본사상의 극치에 살은 그가 얼마나 위대한 철인이었는가는 아산현감(牙山縣監)으로 있을 때의 상소문을 봐도 단적으로 짐작할 수가 있는 것이다. 주변머리가 없어서 토막에서 살은 것도 아니라 유학자 李珥에게 말한대로 욕심이 많아서 성리학을 배울수 없었다는 그의 고언은 그가 우학보다는 자기가 느끼고 깨우치는 민본에의 사상이 깨우친 사상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그 길을 가지 않았던 철인이었던 것이다. 때를 만났더라면 크게 빛났을 제세(濟世)의 큰 인물이었다. 보령시 청라면 옥계리에 그의 위해를 모시고 춘추제향을 받게한 화암서원이 있다. |